[해외취재] 무수한 선택으로 구성된 삶,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그리다

윤애영 설치미술작가·파리한글학교 교장 인터뷰

2025-05-25     정재윤 기자

편집자주|“안개는 멀리서 보면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재밌는 건, 안개에 다가갈수록 희미하게나마 너머를 상상할 수 있게 돼요. 마치 숨은그림찾기 같은 거죠. 제 인생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프랑스에 거주하는 한인 작가이자 파리 한글학교 교장, 윤애영(서양화·88년졸)씨의 삶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일로 가득했다. 끊임없이 변동하는 삶의 연속에서도 그는 과정의 소중함을 잊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비가 내리던 날, 파리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윤애영씨는 “단 하루를 살아도 원하는 일을 하는 삶이 의미 있다”고 느낀다. 정재윤 기자

프랑스에서 더 큰 세계를 담다

프랑스에서 겪었던 예상치 못한 경험은 그를 한 발짝 나아가게 했다. 우리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한 그는 비디오 설치미술을 깊이 있게 공부하기 위해 1988년 프랑스에 처음 발을 디뎠다. 당시 한국에서는 비디오 아트 분야가 활발하지 않았던 터라 그는 프랑스에서 더 넓은 세상과 가능성을 마주했다. 학위 과정을 마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려던 당초 계획과 달리, 그는 프랑스에 정착하게 됐다.

더 큰 세계를 만났다는 기쁨도 잠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는 당장의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베이비시터, 이삿짐 센터, 공항 픽업 등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계속된 도전에 직면했지만, 작품을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그 과정을 기꺼이 즐겼다. 

이후 그는 삼성문화재단이 후원하는 파리 국제예술가촌 삼성아틀리에 1호 입주자로 선정됐다. 그는 마레지구의 ‘레 피유 뒤 칼베르 갤러리(Les Filles du Calvaire)’에 소속돼 안정적인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갔다. 화랑 소속이기에 자신이 원하는 작업가와 작업하는 데 한계가 있기도 했지만, 화랑과의 협업은 더 넓은 가능성을 접하는 계기가 됐다. 큰 작품 위주로 작업해 온 그는 화랑의 권유로 작은 작품들도 시도해 보게 됐고, 이 시도는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예상치 못한 경험과 조언들은 때로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빈 공간을 작업물로 가득 채우고 (전시가 끝나면) 다시 비우는 순간이 엮여 내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가 엮여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찾는 여정이 됐던 것 같아요.” 해외 여러 도시와 공간을 돌아다니며 전시한 경험도 그에게 소중한 배움을 남겼다. 전시하는 장소에 따라 작업물이 달라지는 설치미술 특성상, 작가 자신과 작품이 공간에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경험은 필수적이다. 스위스 융프라우 꼭대기에서 작업했던 경험은 자연과 하나 되는 체험이 되기도 했고, 바르셀로나에서 작업하며 접한 이질적인 작업 문화는 새로운 경험으로 남아 있다.

 

‘영원한 이방인’, 부유하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설치미술 작가로 활동하는 그는 어느덧 37년째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지만 한국인이라는 점은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다. 그는 본인을 ‘영원한 이방인(Éternel étranger)’이라 칭했다. 완전히 다른 배경에서 살아온 사람들 속에서 느끼는 허전함과 갈등은 영원한 숙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직 한국 여권을 사용하는 그는 앞으로도 “프랑스 여권으로 바꿀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호히 말한다. 한국을 떠나 자신과 환경이 바뀌었을지라도 프랑스 사람이 될 수는 없기에, 그는 “우리는 뿌리를 떠나 살 수 없다”고 말한다.

프랑스에서 살아가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불리하게 작용할 때도 있었다. 프랑스 대표 작가를 선발하는 대회에서 최종 단계까지 올라가며 가장 가능성 높은 후보로 거론됐던 그는 프랑스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탈락했다. 하지만, 이방인으로서의 경험은 새로운 작업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인 ‘떠도는 섬(Île flottante)’은 이방인의 정체성을 주제로 한 비디오 영상설치 작품이다. 어릴 적, 그는 심부름을 위해 매일 기차를 타고 외지로 향하곤 했다. 기차 창밖으로 보이는 주택은 저마다 불빛으로 반짝였다. 수많은 빛 가운데 하나인 우리는 겉보기에는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 연결된 존재다. 그는 주택 불빛에 숨은 각자의 이야기를 상상하고는 했다. 

작년 9월 그는 파리 한글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1974년 개교해 지난해 50주년을 맞은 파리 한글학교는 프랑스 교민 사회를 대표한다. 수요일 하루, 4교시 수업을 하는 한글학교는 재외동포가 학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1~3교시는 한글 수업을, 4교시에는 특별활동 문화 수업을 진행한다. 사물놀이, 한국민화 그리기 등 프랑스 사회에서 쉬이 접하지 못하는 한국 전통놀이를 가르치기도 한다. 오랜 기간의 해외 거주로 자신의 한인 정체성을 뿌리 깊게 체감한 그는, “언어가 정체성을 일깨우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한국을 떠나 살더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학생들과 나누고 있다.

 

도착지가 아닌 과정에서 배우는 삶

‘버튼 시리즈’ 중 AI를 기반으로 한 영상 작업물을 보여주는 윤애영씨. 정재윤 기자

한인 작가로서 활동하고 파리한글학교 교장을 맡기까지, 윤 작가의 삶은 예상치 못한 일들 속에서 숨은 가능성을 끊임없이 발굴하는 여정이었다. 그의 인생관은 최근 작업, ‘버튼 시리즈’에서도 드러난다. 버튼 시리즈는 관객이 직접 버튼을 눌러볼 수 있는 체험형 작품이다. 버튼을 누르듯,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삶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자신이 선택한 버튼이 최선이 아닐지 몰라도 그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뜻을 담았다. 안개 속에서도 삶의 숨은 그림을 찾아가는 윤 작가의 여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인생이라는 숨은그림찾기 안에서 하나씩 진실을 깨닫고, 몰랐던 것을 배우는 과정이 우리 삶의 여정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게 제 작업이기도 하고, 제가 추구하는 바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