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E열] 망가진 채 살아가는 ‘성난 사람들’에게
불행하고 싶어서 불행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망치고 싶어서 관계를 맺고, 파괴하고 싶어서 가정을 꾸리는 사람은 없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단지 더 나은 하루하루를 보내기 위해서 한 선택들이 결국 우리를 몇 번이고 불행으로 이끈다는 것. 행복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다 함께 불행해지고 만다는 건 진정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성난 사람들(BEEF)>은 ‘행복해지고 싶은’ 두 주인공이 난폭운전 사건에 휘말리면서 시작한다. 집안을 일으키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가장으로 거듭나고 싶지만 역부족인 한국계 미국인 수리공‘대니’. 자수성가에 성공했지만 초대형 계약 성사를 앞두고 신경이 잔뜩 곤두선 베트남-중국계 미국인 사업가 ‘에이미’. 어떻게든 인생을 꾸려가 보려고 발버둥 치는 두 사람은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노력해서 불행해진다. 애를 쓰고 품을 들여서 고통스러워진다. 그러니까 억울하고 울화가 치밀고 화병이 난다. 꼭 잘 풀리려고만 하면,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살아보려고만 하면 뭔가 꼬이니까. 에이미의 남편 조지, 대니의 동생 폴은 이 고약한 싸움을 알아주기는커녕 매번 결정타를 날린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의 광기 어린 분노에는 어딘가 쓸쓸하고 짠한 구석이 있다.
도로 위 추격전으로 시작한 대니와 에이미의 갈등은 점차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집 주소를 알아내고 화장실에 오줌을 갈기는 것으로, 서로의 남동생과 남편에게 접근하는 것으로, 심지어는 총격이 오가는 아동 납치 사건으로. 걷잡을 새 없이 번져가는 두 사람의 ‘미친 짓’은 어쩐지 애처롭고, 치열하고, 처절하고… 생뚱맞게 웃음이 터져 나온다. 서로를 골탕 먹이려는 둘의 모습은 어찌나 생기가 넘치는지 마치 이런 싸움을 평생토록 기다려온 것만 같다. 상대방을 공격하려던 꼼수가 번번이 자승자박의 복선이 되는 것까지, 철천지원수 두 사람은 데칼코마니가 따로 없다. 우스꽝스러운 복수를 주고받을수록 둘의 교집합은 더욱 선명해질 뿐이다. 대대로 물려받은 트라우마, 떨쳐낼 수 없는 불안과 공허함, 남몰래 간직해온 끔찍한 비밀들과 죄책감, 그러므로 나는 사랑받을 수 없다는 수치심과 두려움. “망가진 사람이 자신의 망가짐을 퍼뜨리는 건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에이미의 얼굴에는 사실, 자신의 망가짐을 들키기 싫은 공포가 역력하다.
언뜻 보기엔 제정신이 아닌 듯한 두 남녀의 이야기가 낯설지만은 않은 이유는, 아시아계 미국인 주인공들이 공유하는 정서에 한국인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난 사람들>을 연출한 이성진 감독은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살아온 경험을 작품 속에 녹여냈다. 갚아야 할 부모님의 희생, 불편하고 어려운 고부 관계, 가부장적인 혈연 중심의 문화는 한국 드라마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있는 요소들이다. 늘 한계에 도달한 채 숨구멍을 찾는 대니와 에이미의 모습이 남 일 같지 않은 이유 역시, 이제는 익숙한 이름인 ‘번아웃 증후군’을 닮아 있기 때문일 듯하다. 꼭 주인공 둘뿐만이 아니다. 예술가 아버지의 그늘 아래 사는 조지, 형에겐 아직도 철없는 어린애인 폴, 한인 교회 커뮤니티를 짊어진 에드윈, 쌓지 못한 커리어를 갈망하는 나오미. 모두가 채워지지 않는 무기력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하고 있다. 더군다나 우리는 ‘화병’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아닌가. “넌 서양식 상담 치료가 동양인한테 안 먹힌다는 증거”라는 대니의 대사에는 씁쓸한 유머는 물론 가려운 곳을 긁는 듯한 통쾌함이 있다.
상당히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이고 비문명적으로 보이는 복수극은 사실 어떻게든 살아가 보려는 두 사람의 몸부림 같다. 둘은 오래도록 외로웠을 것이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싸움을, 내가 물려받았고 어쩌면 또다시 물려주게 될지도 모를 아픔을 홀로 통과하면서. 그리고 복수를 거듭하면 할수록 그런 서로를 알아보게 됐을 것이다. 맹렬한 분노 뒤에 웅크리고 있는 고독과 무력감을 봤을 것이다. 그러니 너를 바라본다는 건 곧 나를 바라본다는 것, 너를 이해한다는 건 결국 나를 이해한다는 것. 네 입에서 내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네 목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올 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나의 가장 깊고 어두운 내면을 네가 거울에 비춰 보듯 들여다봐줬을 때. 그때 대니와 에이미는 비로소 덜 외로워졌을 거라 생각하면 덩달아 기이한 위로가 찾아온다. 흔히들 말하는 치유나 정화와는 사뭇 다른 감각이다. 망가진 사람들도 망가진 채로 살아갈 수 있다는, 그렇게 서로를 알아보고 보듬어줄 수 있다는 반쯤 찌그러진 희망. 어쨌거나 우리는 자주 불행하겠지만.
<성난 사람들>은 2023년 공개 후 미국 에 미상 8관왕을 거머쥐었다. 현재는 송강호, 윤여정, 오스카 아이작, 캐리 멀리건 등이 출연하는 시즌 2를 제작 중이다. 최근 영화 <썬더볼츠> 각본으로 스크린을 찾기도 한 이성진 감독, 그가 그려낼 또 다른 ‘성난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