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탑] 비오는 날의 떼창처럼

2025-05-25     강다현 디지털콘텐츠마케팅부장

우리는 보통 기대와 어긋난 하루를 실망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런 순간들 속에서도 기쁨을 길어올 수 있다고 믿는다. 폭우주의보가 내려졌던 어느 축제 날도 그랬다. 비에 푹 젖은 신발과 축축한 공기, 사람들의 우산에서 떨어진 물줄기가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던 순간까지. 이상적인 하루는 분명 아니었다.

비 덕분에 더 크게 울려 퍼지던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떼창, 우산을 집어던지고 다 함께 비를 맞으며 뛰던 젊음의 열기, 그리고 친구들과 어깨를 붙이고 서로를 감싸 안으며 비를 피하던 그 온기까지-그 날의 기억은 고스란히 ‘행복’이라는 단어로 형용돼 남아 있다. 그 모든 순간은 내가 만든 선택의 결과였다. 행복은 누군가가 주는 보상이 아니라, 때로는 그런 결정에서 비롯된다.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날씨처럼, 삶에는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저물음 같은 순간들이 있다. 예상하지 못한 변화, 균형을 흔드는 감정의 파도들. 그럴 때면 나는 나를 웃게 할 수 있는 작은 구석을 기어이 찾아냈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을 가능하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오래 고민했다. 돌아보면 그것은 특별한 기술이라기보다 태도에 가까웠다. 예전에는 그런 기쁨을 지키려면 더 강해져야 한다고 믿었다. 더 열심히, 더 완벽하게. 그러나 그런 방식은 대개 버거움만을 남겼고, 내게 진짜 필요한 건 완벽함이 아니라 회복할 수 있는 숨구멍이었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이란 단순히 고통을 피하는 상태가 아니라, 삶 속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하고 그것을 즐기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이 말은 행복이 어떠한 조건이 충족돼야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삶은 본래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능하다. 행복은 고통이 완전히 사라진 이후에야 허용되는 상태가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도 우리가 무엇에 주목하느냐에 따라 발견될 수 있는 감정이다. 러셀의 정의는 ‘행복은 시선의 문제’라는 내 생각과도 닿아 있다. 기쁨을 잘 알아보는 감각은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스트레스 속에서도 나를 무너지지 않게 지키는 하나의 능력이 된다.

지금의 나는 무언가를 이겨내야 한다는 압박감보다는, 나를 지켜낼 수 있는 선택을 먼저 떠올린다. 삶의 균형은 대단한 결심에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내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가에 달려 있다. 그 중심에는 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성취가 아니라, 나를 나로 있게 하는 일상의 조각들이다. 그 어떤 설명보다 단단하게 나를 버티게 해준 것들은 그런 평범함이었다.

입안이 아릿해질 만큼 달디 단 딸기 케이크를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이에게 시덥잖은 “만약에”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의 골똘한 생각과 답변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멋진 노래를 들으며 파워 워킹하기, 멋진 나의 미래를 상상하고, 머스크 향의 향수를 뿌리는 일. 이렇듯 작고 사소한 일들은 어떤 하루가 저물기만 한 날처럼 느껴져도, 그것이 결국 새로운 아침을 준비하는 과정일 수 있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이어지게 해준다. 이런 사소한 기쁨들은 하루에 조금씩 온기를 더했다. 예기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나는 그걸 스트레스로 정의하지 않았다. 낭패라거나 실패라기보다는, 그 상황 자체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다시 바라보려 했다.

흐트러진 계획, 예상치 못한 감정, 무너지는 기대도 내 식대로 해석하며, 그 안에서 내 방식의 의미를 덧붙였다. 나는 나를 불편하게 했던 순간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나만의 언어로 다시 살아보려 애썼다. 그래서 내게 행복은 감정을 덮는 기술이 아니라, 순간 자체를 다르게 살아내는 연습이 됐다.

누군가에게는 행복이 목표일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 행복은 어떤 순간을 스스로 선택하고 품을 수 있는 태도에 가깝다. 하루가 온전히 빛나지 않아도 좋다. 다만 그 안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면, 나는 그걸 행복이라 부른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을 다독이고 있을지 모른다. 좋아하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그 순간을 조금 더 붙잡는 일. 그 작은 반복들이 무심코 지나칠 뻔한 하루에 온기를 더해줄지도 모른다. 아주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에게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방식으로. 그리고 언젠가, 그렇게 지켜낸 하루들이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삶 속에 조용히 눌러앉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