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E열] 복제된 삶, 삭제된 감정: ‘미키 17’(2025)과 서발턴의 생존 방식
죽은 줄 알았던 주인공이 아무렇지 않게 다시 깨어나는 순간, 영화 ‘미키 17’(2025)은 존재와 생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살아있다는 건 무엇인가? 그리고, 그 삶이 복제될 수 있다면 감정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미키는 인류의 행성 이주 프로젝트에 투입된 ‘익스펜더블’, 즉 죽어도 되는 존재다. ‘죽는 역할’을 대신 수행하며, 죽을 때마다 생전의 기억을 다른 몸에 업로드해 재생된다. 그는 매일 위험한 실험에 투입되고, 상처를 입고, 다시 출력되며 살아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점점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간다. 아니, 감정을 느끼지 말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감정은 이 세계에서 비효율이다. 사랑이라는 감정과 수반되는 행위들조차도 칼로리라는 수치로 여겨지며 금지된다. 즉, 시스템은 감정을 제거함으로써 통제를 유지하려 한다. 미키가 감정을 드러낼 때 상관은 말한다. “you’re an Expendable. You’re here to be expended!” 분노와 슬픔은 주체의 고유한 반응임에도, 시스템은 그것을 불필요한 오류로 간주한다. 감정이란 무엇인가? 정동 이론가 로런 벌랑은 감정을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감내하는 지속적인 상태”라 말한다. 미키의 삶은 지속된다. 그러나 그 감정은 사회적으로 ‘승인되지 않은 상태’다. 미키는 살아 있지만, 감정적으로는 삭제되어 있다.
여기서 가야트리 스피박의 개념이 유효해진다.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
스피박에게 서발턴이란 단순히 목소리가 없는 존재가 아니라, 말해도 ‘의미 없는 것’으로 취급당하는 존재다. 미키가 분노해도, 불안해도, 사회는 듣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복제 가능하므로, 고통조차도 ‘재현 가능한 기술적 경험’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는 말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다. 그는 감정을 느끼고 있지만, 누구도 감정의 의미를 승인하지 않는다. 서발턴의 감정은 승인되지 않는다.
특히 인상 깊은 장면은 미키가 복제되고 나서 바로 바닥에 떨어지는 장면이다. “출력”된 몸은 환영받지 않는다. 이 새로운 몸은 즉각 임무에 투입될 뿐이다. 어떤 기계가 재가동되듯, 그의 신체는 준비되지 않은 채 다시‘사용’된다. 그리고 이런 비인간적 재현의 반복은 결국 감정의 퇴행으로 이어진다. 감정은 의미를 가지지 못할 뿐 아니라, 아예 필요 없는 것처럼 취급된다.
영화는 이러한 비인간화된 감정 억제를 원주민 생명체 ‘크리퍼’에 대한 묘사로 확장한다. 크리퍼는 인간 식민자들에게 언어도, 감정도, 고유한 주체성도 없는 존재로 인식된다. 그들은 협상이나 소통의 대상이 아니라 채집, 분석, 그리고 정복의 대상이다. 스피박이 말한 서발턴의 또 다른 전형, ‘식민화된 타자’가 여기서 등장한다. 말할 수 없는 존재는 지워질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맥락은 영화 ‘서브스턴스’(2024)와도 강하게 교차한다. 그 영화에서 엘리자베스는 감정을 드러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이 들어 더 이상 '보여질 수 없는 몸'이 되었기 때문에 퇴출된다. 사회는 그녀를 “더 이상 충분하지 않은 여성”으로 판단하고, ‘수’라는 젊고 아름다운 대체 존재를 요구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교체 이후부터다. 엘리자베스는 감정을 억제하고 침묵하도록 요구받으며, 결국 자신의 존재 자체를 삭제하고자 한다. ‘서브스턴스’(2024)의 세계는 감정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신체’만을 환영한다. 여성의 늙은 몸은 억눌리고, 여성의 감정 또한 연출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반면 ‘미키 17’(2025)은 복제된 남성의 감정까지 제거한다. 익스펜더블인 미키는 감정을 표현하면 시스템 오류로 간주된다. 이 두 영화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동일한 구조를 드러낸다. ‘서브스턴스’(2024)는 감정이 ‘나이 든 여성의 비가시성’과 연결되어 삭제된다면, ‘미키 17’(2025)은 감정이 ‘복제된 존재의 비인간성’과 함께 제거된다. 결국, 체제가 ‘쓸모 없음’이라 간주하는 감정은 누구의 것이든 무대에서 지워진다.
감정을 배제하는 사회는 작은 것들을 간과하고 주체성을 삭제하는 사회다. 누군가의 감정과 승인하지 않는 것은 그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기에 매우 폭력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키 17과 18, 엘리자베스와 수, 이들은 우리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스크린 밖 우리 또한 감정을 조절하고 침묵하고 순응하며 자기 자신을 적절하게 연출할 것을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키 17’(2025)은 이 감정의 말살에 작은 균열을 낸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미키 18’은 분노를 숨기지 않고,억압된 체제에 맞선다. 그는 복제되었지만 순응하지 않는다. 그는 말하고, 그 말은 이전보다 더 크고 무겁고 심지어 위협적이다. 이때 감정은 오류가 아니라 저항의 에너지로 변모한다.
영화는 조용히 묻는다.
“복제 가능한 삶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를 느끼는 존재로 남을 수 있을까?”
그리고 덧붙인다.
“그 감정은, 이제 말해도 들릴 준비가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