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칼럼] 인공지능 시대의 미술
어느 날 아내가 카톡으로 그림 한 장을 보냈다. 만화책의 삽화치고 좀 익숙하다 했더니 지난 여름 오키나와 여행 갔을 때 찍은 나와 아내, 그리고 중학생 아들의 모습이다. 유행에 민감한 사람답게 아내는 요즘 유행한다는 지브리풍 프사(프로필 사진)을 만들어 보내곤 하루 종일 미소가 가지실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턱수염이 아무렇게나 자라 마치 초췌한 '바람 계곡' 농사꾼 같은 나와 달리, 아내와 아들 녀석은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공주님, 왕자님처럼 예쁘고 귀여운 모습이다. 그날의 ‘진짜’ 사진은 여행에 지친 가족들의 모습을 가감없이 담고 있었겠지만, Chat GPT는 우리의 땀내나는 여정을 마치 지브리 만화의 한 장면처럼 낭만적이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다.
생성형 인공지능을 이용해 지브리 스타일로 사진을 변경하는 것이 요즘 대유행이다. 주변 지인들 뿐만 아니라 연예인, 정치인 할 것 없이 모두 난리다. 오픈 AI의 CEO인 샘 올트먼(Sam Altman)도 자신의 SNS 사진을 지브리풍으로 바꿨을 정도니, 이쯤이면 AI 이미지 열풍이다. 열풍이 좀 과했을까? 올트먼은 며칠 후 전 세계에서 쇄도하는 과도한 지브리 스타일 요청에 “그래픽 처리 장치(CPU)가 녹아내리고 있다”며 사용자들의 자제를 촉구했다. 그런데 지브리 프사의 문제는 CPU만의 문제가 아니다. 도대체 누가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 스타일을 마음대로 쓰라고 허락했단 말인가? 한 쪽에서는 누군가는 “지브리 스타일 AI 이미지가 [...] 기술이 예술의 문법과 감성을 얼마나 정교하게 재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사례”(스페인 언론사 엘 파이스(El País)의 4월 2일 자 칼럼)라고 칭송하고 있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몰고 올 저작권 문제, 예술가의 독창성과 창의성을 폐기시켜 버리는 AI의 가공할 생산성에 대한 경고음이 들린다. 일본 애니메이션 ‘원피스’의 감독인 이시타니 메구미는 이 현상이 “지브리 브랜드의 가치를 훼손할 수 있는 행위”라고 비난하며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이렇게 싸구려 취급받는 것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혹자는 AI가 지브리만의 전유물을 대중 모두에게 허락함으로써 이미지의 진정한 민주화를 가능케 했다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이에 대해 애니메이션 감독 헨리 서로우의 일갈은 경청할 만하다. “이걸 예술의 민주화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고, 거짓말하는 것이다. 훌륭한 예술가나 감독이 되는 것이나 올림픽 선수가 되는 것을 민주화할 수는 없다. 평생의 노력이 필요한 건 절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AI로 인해 전례 없는 문화의 격변기를 맞이하고 있다. 새로운 기술에 의해 문화가 요동칠 때 으레 그렇듯 그 기술에 대한 기대와 걱정이 공존한다. 미술도 예외는 아니다. 이른바 ‘기술적 형상’(Technischen Bilder, 빌렘 플룬서)이 회화를 대체한다. 2022년에는 텍스트 기반 생성형 AI인 미드저니(Midourney)로 만든 그림이 미국 콜로라도 주립 박람회 미술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해 논란이 된 바 있다. 수상자인 제이슨 앨런은 수차례 협박 메일을 받았으며, 트위터에는 85,000회 이상의 반대 의견이 올라왔다고 한다. 한 반대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는 예술의 죽음이 바로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을 보고 있다.” 이처럼 인공지능은 그 놀라운 성능과 파급력으로 창조적 문화 전반을 낡은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런 변화 속에서도 미술의 항구한 가치는 결코 잊혀질 수 없다. 왜냐하면 AI 예술은 그 초기부터 전통적인 미술에 대한 채무를 결코 잊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1965년 뉴욕 하워드 와이즈 갤러리에서 최초의 컴퓨터 아트 전시회 중 하나인 <Computer-Generated Pictures>가 개최된다. 이 전시는 독일의 게오르그 네스(Georg Nees), 프리더 나케(Frieder Nake)와 함께 컴퓨터 아트의 '3N' 중 한 사람이라 불리는 마이클 놀(Michael Noll)의 전시였다. 당시 벨 연구소의 연구원이었던 놀은 동료인 벨라 줄스(Bela Julesz)와 함께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던 중 버그로 인해 출력된 기묘한 형상들을 보고 “추상화 같다”고 말했다. 이 농담은 곧 전시로 이어졌고, 오늘날 컴퓨터 아트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원이 됐다. 무엇이 과학자들을 미술로 이끌었을까? 벨 연구소의 복잡한 기계 장치였을까? 필자의 생각에 그것은 바로 “추상화 같다”라는 생각, 즉 이 연구자들의 기억 속에 자리잡은 미술에 대한 경험이, 그렇지 않았다면 그저 괴상한 선들의 중첩에 불과했을 이미지들에 미학적 가치를 부여케 한 것이다. 초기 생성형 AI 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헤롤드 코엔과 그의 AI 그림장치 <아론(AARON)> 역시 미술에 대한 충만한 기억 속에서 자신의 혁신적인 실험을 시작한다. 아론은 작은 거북이처럼 생긴 규칙기반시스템(프로그래밍된 지침을 통해 패턴과 모양을 생성하는 초기 생성 AI형식) AI 장치다. 원래 성공적인 경력의 화가(코헨은 1966년 베니스 비엔날레 영국관을 대표한 화가 중 한 사람이었다)였던 코헨은 아론에 ‘IF-THEN’ 알고리즘을 입력하여 추상화가의 조형과정을 모방하도록 만든다. 가령 아론은 “(IF)긴장감을 주려면 (THEN)대각선을 사용하라,” “강조하려면 보색을 사용하라” 등등 화가들이 사용하는 기법상의 관습을 규칙으로 정립해 형태를 완성해 나간다. 아론의 그림이 인류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완전히 새로운 기계적 화면이 아니라, 꽃과 인물 등 인간적인 소재와 표현성을 특징으로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2018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43만 달러에 판매된 최초의 AI 회화가 있다. 파리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AI 창작 콜렉티브 오비어스(Ovious)가 적대적 생성 신경망(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 GAN)을 활용해 그린 <에드몽 드 벨라미(Edmond de Belamy)>라는 그림이다. 오비어스는 WikiArt의 데이터 베이스에 있는 초상화 15,000점을 학습시켜 <벨라미 가족>이라는 초상화 연작을 제작했는데, <에드몽 드 벨라미>는 그중 하나였으며, 벨라미(bel-amy)라는 이름은 적대적 생성 신경망의 창시자인 캐나다의 컴퓨터 공학자 이언 굿펠로우(Goodfellow)의 이름을 불어식으로 번역한 것이다. 오비어스는 “인간이 만든 창조물도 무의 상태에서 갑자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계 학습과 다를 것이 없다”는 말로 저작권 문제에 대한 세간의 의심에 답했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 AI라는 혁명적 기술의 생산품이 인류의 시각적 전통을 넘어서는 새로운 이미지가 아니라, 바로 그 전통으로부터 유래함을 역설한다. 밸라미의 흐릿한 초상들이 16세기 초상적 전통의 잔존하는 유령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오늘부로 회화는 죽었다.” 1839년 파리에서 사진의 발명 소식을 듣고 화가 폴 들라로슈는 이렇게 외쳤다. 그러나 들라로슈의 걱정스러운 외침과 달리 회화는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다시금 개화했고, 모더니즘의 위대한 전통을 갱신해가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발터 벤야민은 초기 사진 속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회화의 아우라를 목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로운 것의 창조적 가능성은 새로운 것에 의해 해소됐으면서도 동시에 자극을 받아 개화하는 이전의 형식과 조형 도구를 통해 서서히 드러난다.” (벤야민 <사진의 작은 역사>) 그러니 AI 이미지의 창조적 가능성이 이제는 낡은 것이 되어버린 회화로부터 서서히 드러난다는 우리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왜 우리는 지브리 프사에 열광했을까? AI가 우리의 과거를, 전통을, 기억을 참고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던 것은 아닐까? 혹은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그처럼 따스한 인간적 표현이라는 점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