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학의 연립방정식] 낙태죄 위헌 결정 이후 6년의 공백, 방임된 여성의 건강권과 재생산 정의

3. 재생산권과 여성

2025-05-11     배진아 기자

편집자주 | ‘여성학의 연립방정식’은 여성학의 간학문적 특징을 이용해 한국 사회 속 여러 이슈를 여성학적 관점으로 탐구하는 인터뷰 코너입니다. 우리대학 교수님을 비롯한 전문가 두 분을 모셔 대담을 나누고, 이를 글과 영상으로 발행합니 다. 1700호를 시작으로 1709호까지 3주 간격으로 총 4회 연재됩니다

 

우리대학 김선혜 교수와 박슬기 산부인과 전문의가 재생산 정의에 대한 논의를 나누고 있다. 박소영 취재미디어기자

2019년 4월11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 결정으로 임신중절은 더 이상 범죄가 아니다. 해당 판결 이후 6년이 지났지만, 안전한 임신 중절을 위한 법률과 보건 시스템 마련은 여전히 미비하다. 임신중절권이 방치된 현 상황은 여성의 건강을 위협, ◆재생산 정의를 훼손하고 있다. 이대학보는 지난달 10일 우리대학 김선혜 교수(여성학과)와 박슬기 산부인과 전문의(유튜브 ‘언니들의병원놀이’)를 만나 ‘재생산권과 여성’에 대한 논의를 나눴다.

 

저출생 담론 배후의 이상 국가

김선혜 교수는 “재생산권 논의 확장을 위해선 안전한 의료 서비스와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함께 보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영인 사진기자

한국의 인구정책은 국가의 상황과 필요에 따라 여성의 출산을 통제하거나 장려하는 방식으로 수립됐다. 1960년대에서 1990년대 한국은 베이비붐 시기를 지나며 국가 빈곤 상황에서 가정과 국가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한 인구 억제 정책을 펼쳤다. IMF 외환위기 이후부터는 경제 불안과 일자리 부족, 자녀 양육 부담이 증가하며 출생률은 급감했다. 이후 고령화가 사회 문제로 규정되며 임신과 출산을 장려하기 위한 정책이 추진되고 있다.

김 교수는 국가 차원의 인구정책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동의하면서도, 그동안 인구정책이 여성의 몸과 관계 맺어온 방식을 꼬집었다. 그는 정상적이고 이상적인 출산율이 존재하는 것처럼 ‘저출생’을 사회 문제로 규정하는 것이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인구정책은 인구 변화에 따라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자원의 분배를 결정한다. 그러나 국가가 목표로 하는 인구수에 맞춰 출산을 억제하거나 장려하는 방식은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인구 변화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정책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국가가 바라는 출산율을 정해놓고 여성의 몸에 책임을 돌리는 방식은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여성 신체의 자기 결정이 옳은지 그른지가 국가의 판단에 달려있기도 했다. 예컨대 낙태죄 위헌 결정 이전까지 임신중절은 범죄였지 만 때에 따라서는 임신중절이 장려됐다. 모자 보건법 14조 1항에서는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 질환이 있는 경우”나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에 대해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허용함을 명시하고 있다. 박 전문의는 “이는 정상과 비정상 논리 안에서 사람의 인생에 대한 자격을 묻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애인 여성을 대상으로는 강제적인 불임 시술이 행해지며 재생산의 권리를 박탈하기도 한다. 지금의 한국에서 장애인 여성들은 임신과 출산을 위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싸우고 있는 한편 비장애 여성들은 아이를 낳는 것을 강요당하고 있다. 비장애 여성에게는 임신과 출산을 장려하고, 장애 여성에게는 금지하는 문제는 곧바로 정상성의 문제와 결부된다. 그는 인구 증가라는 목적 아래서 정상성을 생산·유지하는 인구만을 늘리고자 하는 모순을 지적했다.

 

발전하는 기술, 발전하지 않는 인식

박슬기씨는 “피임에 대한 선택지와 기본적 인프라가 매우 부족하다”며, “국가적 인구 정책에 여성의 몸이 도구화되는 일이 반복돼왔다”고 말했다. 정영인 사진기자

임신중절은 흔히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자기결정권 대립이라는 프레임에서 논의된다. 하지만 해당 구도는 재생산을 여성 개인의 책무로 돌리게 된다. 김 교수는 “태아 생명권이라는 말로 도덕적 우위를 차지한 프레임은 여성들의 삶을 지운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재생산 권리에 대한 논의가 넓어지기 위해서는 합법적인 의료 서비스가 필요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기 위해서는 사회와 공동체가 함께 안전한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비혼모, 성소수자 가족 등 다양한 가족 형태가 가능해졌지만, 재생산이 여성의 책무라는 사회적 낙인과 차별이 변하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리라 본다.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재생산 기술’ 또한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 박 전문의는 “어떤 기술도 그저 객관적이라고만 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최근 저출생 해결 방안으로 불임·난임 치료, 냉동 난자 시술 지원 등 보조 생식 기술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하지만 보조 생식 기술이 여성의 몸과 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위험성, 여성이 직접 경험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고 있다. 박 전문의는 “임신과 출산은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여전히 여성의 몸에 직접적으로 일어나는 매우 큰 변화이고, 여성의 몸이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문제”인데, 보조 생식 기술에 대한 지자체의 적극적인 지원과 홍보가 여성의 몸에 미치는 실질적인 변화와 위험성을 가린다고 말했다. 그는 기술이 출산 장려 인구정책과 맞물리며 여성의 몸을 또다시 도구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출산을 강요하는 정책과 동시에 한편에서는 이를 의료적으로 건강하게 뒷받침해야 할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등 필수적인 의료 인프라는 가장 먼저 사라지고 있는 현실에 우려를 표했다.

 

필수적이고 보편적인 재생산권을 위해

김 교수는 “낙태죄 폐지는 재생산권 보장을 위한 첫걸음일 뿐”이라고 말했다. 낙태죄 폐지가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 중절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임신중절의 의료보험 항목 급여화와 임신 중절 약물 ‘미프진’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신중절의 의료보험 급여화는 임신중절이 필수 의료임을 국가가 명시하고, 누군가 필요할 때 국가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현재 높은 수술 비용 부담이 줄어 임신중절에 대한 접근성도 확대될 수 있다. 미프진 또한 임신중절이 비범죄화된 대부분의 국가에서 상용화되고 있으며, 경제적·물리적으로 병원에서 수술받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도입이 필요하다. 그는 “많은 여성이 삶에서 경험하는 문제들을 안전하고 합법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의료 시스템과 법적 체계가 마련돼야 함”을 강조했다.

박 전문의는 “임신 중절은 의료 행위”임을 명확히 하며 여성들에게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유독 임신중절에 관해서만 환자 당사자가 아닌 의료인이나 국가가 환자의 상황에 왈가왈부하는 모순을 지적했다. 현재 한국에서 의사의 진료 거부는 불법이지만, 임신중절에 한해서는 환자를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진료를 거부할 권리가 의사에게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낙태죄가 위헌으로 판결된 이후에도 임신중절을 위한 법적 공백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들의 대응 방식도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이는 또다시 누가 재생산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정상성 문제와 연결된다. 그는 의료보험 급여화를 통해 실질적으로 접근성을 강화해 더 많은 여성을, 배제되는 여성 없이 의료와 건강의 권리로 접근해야 함을 강조했다. 박 전문의는 “규제를 만들 때는 선 밖으로 밀어낸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 보길, 그 사람의 삶을 고민해 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누구를 존중해야 하는가보다는, 왜 선 밖으로 밀어내야 하는가로 사회의 질문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 재생산 정의: 재생산은 단순히 임신과 출산에 국한되지 않는다. 재생산은 가족 구성, 양육, 보건 등의 문제와 연결된다. 국가가 여성 당사자와 태어난 아이의 삶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책임의 문제로서, 사회 정의와 관련해 논의돼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