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야 산다] 읽는 삶, 그 회복의 시작

2025-05-11     문화라(작가·독서모임 활동가)

우리대학 국어국문학과를 1992년에 졸업하고,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2002년에 졸업했다. 대학과 고등학교에서 오랫동안 글쓰기와 독서 관련 강의를 진행했으며, 현재는 독서모임 운영과 독서에 대한 책 집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는 『다시, 문학이 필요한 시간』, 『질문의 힘을 키우는 초등 그림책 인문학』 등이 있다.

10대와 20대에는 책을 읽는 일이 곧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30대에 접어들면서 독서는 점점 삶의 주변부로 밀려났고, 책 읽기의 기쁨을 느낄 새도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결혼과 동시에 주어진 여러 역할로 인해 하루하루는 버겁고 빠르게 지나갔다. 책은 점점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 놓이게 됐다.

돌이켜 보면 그때는 삶의 방향을 잃고 한없이 불안정했던 시기였다. 세상의 말에 쉽게 흔들렸고, 마음은 늘 복잡하여 무엇 하나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하루의 끝자락이면 어김없이 지쳐 있었고, 타인의 기대와 외부의 기준을 채우느라 정작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조차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서재를 정리하다가 한 권의 책을 펼쳐 보게 됐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었다. 포스트잇이 붙여져 있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저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간단하게 그리고 단조롭게 중얼거릴 뿐입니다.” 그 구절을 읽으며 다시 나 자신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누군가의 엄마도, 아내도, 딸도 아닌, 온전히 나로서 살아가는 일을 더는 미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연히 꺼내 든 책 한 권은 변화의 계기가 됐다. 끝없이 밀려오는 혼란 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다시 책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책 속에 담긴 문장에서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찾고 싶어졌다. 그리고 비슷한 고민을 품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눠 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독서모임을 시작하게 됐다.

독서모임을 통해 다시 책을 가까이하게 되면서 서서히 변화하게 됐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아 갔고, 스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감정들과 마주하는 일도 조금씩 익숙해져 가면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얼마 전 매트 헤이그의 ‘라이프 임파서블’을 읽다가 “독서는 내가 살고 있는 삶 이상을 살도록 도와주지. 단칸방 판잣집이었던 정신 세계를 대저택으로 바꿔 줘.”라는 구절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받아들이는 일이었고, 그로 인해 사고의 지평이 서서히 확장되는 것을 느꼈다.

독서를 하다 보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에 대한 확실한 답을 주기보다는 질문을 던져주는 책을 만나게 된다. 타라 웨스트오버의 ‘배움의 발견’이라는 책도 그중 하나였다. 작가는 교육을 받아 본 적 없는 가정에서 자라나 극단적인 신념과 가부장적 억압 속에서도 스스로 배움의 길을 선택하며 삶을 바꾸어나간다. 그가 겪은 성장과 회복의 여정은 독서 가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힘이 무엇인지 떠올리게 해 주었다.

독서를 통해 흔들리더라도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됐고, 더 나은 나로 살아 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어떤 책은 친구처럼 곁을 지켜 주었고, 또 어떤 책은 삶의 방향을 알려 주는 이정표가 돼 주었다. 독서를 하며 여러 질문을 품게 되었고, 그 물음 덕분에 내면세계는 조금씩 확장돼 갔다.

가끔 사람들에게 책을 왜 읽느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책을 읽는다고 당장 삶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는 말과 함께. 처음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지만, 지금은 이렇게 답을 한다. 책을 읽는 일은 똑같은 하루를 살더라도 조금 더 넓은 시야로, 더 깊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해 주는 힘을 준다고.

작가들이 글을 통해 전하려는 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해하고, 그 복잡하고 모순된 내면을 함께 들여다보자는 제안일지도 모른다. 한강 작가가 건넨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라는 물음처럼, 인간은 선함과 악함을 동시에 품은 존재다. 그 이중성과 혼란 속에서도 여전히 인간은 아름다울 수 있으며, 회복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아마 그 믿음이 있기에 작가는 계속해서 글을 쓰고, 우리는 그 글을 읽으며 희망이라는 감정을 떠올리게 된다.

요즘도 나는 매일 책을 읽는다. 변화는 천천히, 눈에 띄지 않게 찾아온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는 그 조용한 순간들이 삶의 결을 조금씩 달라지게 만든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오늘도 책을 읽으며, 나만의 속도로 하루를 살아간다. 만약 지금 삶이 조금 흔들리고 있다면, 책 한 권을 조용히 펼쳐 보는 것도 좋겠다. 그 안에 담긴 한 문장이 오래도록 마음을 붙잡아 주는 힘이 되어 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