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야 산다] 나의 밑줄, 나의 이야기
이화인문과학원 교수로 현대소설 및 장르문학 교육 분야의 연구와 강의를 담당하고 있다. 서강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9년부터 우리 대학에 재직하며 현대소설과 진화론, 포스트휴먼 스토리텔링, 다매체 시대의 장르소설, 다문화상호문화 교육 등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보통 책을 읽다 보면 마음에 드는 구절이나 나중에 논문에 인용할 부분에 밑줄을 긋는다. 형광펜이나 연필로 쓰-윽 그으며 간단한 메모도 하고, 이도 저도 귀찮으면 책 페이지의 한 구석을 접어놓고 다시 볼 날을 기약한다.
그 언젠가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즈음엔가, 나는 문학이론서든 소설이든 책을 읽으며 꼭 자를 이용해 밑줄을 긋곤 했다. 나를 사로잡은 활자 아래로 자를 대고 반듯하게 줄을 그으면, 나의 의식과 손끝 감각이 그 활자와 그 의미에 맞닿는 듯했다. 석사 논문을 쓰던 어느 날, 한 선배가 “줄만 치지 말고, 공부를 해”라고 말해서 보니, 세미나 준비로 읽던 S. 리몬 케넌의 『소설의 시학』(문학과지성사 판)의 한 페이지에 온통 밑줄이 쳐져 있었다. 그것도 깊고 반듯하게 뒷장이 파일 정도로. 그 밑줄은 논문에 인용하고 싶은 부분이기도 했겠지만, 어쩌면 줄 사이에 틈을 만들어 강렬한 나만의 서사학 논리를 밀어 넣어 리몬 케넌의 이론이나 논리를 깨뜨리고 싶은 욕망이 투사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자로 밑줄 긋기란 단순한 줄긋기가 아니다. 책 내용과 연결되는 인식의 선이며, 책 내용에 균열을 내어 나의 사유와 상상력, 감각을 그 속에 집어넣어, 그 텍스트를 분석하고 재창조하는 일이었다. 가령 ‘인물은 존재인가, 행동인가’라는 내용에서 이 견해들을 절충해야 한다는 리몬 케넌의 주장에 밑줄을 긋고, “인물의 성격은 행동(사건)으로부터 구조화돼야 한다.”라는 메모를 남겨 놓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뭐 대단한가!” 싶지만, 가지런한 밑줄 옆에 또박또박 글을 쓸 때는 매우 우쭐한 기분이었으리라. 『소설의 시학』은 그 이후로도 여러 번의 세미나를 거치며, 형광펜이 문장을 덮고, 메모 옆에 다른 메모가 붙으며, 그렇게 낡은 책이 돼갔다. 가끔 아무리 해도 무료해져 다시 그 책을 펼쳐볼 때면, 오래전 파란 눈빛의 나를 마주하곤 한다.
그렇게 대학원을 졸업하고 여러 대학으로 강의를 다니던 어느 가을, 나무에서 자란 할아버지가 허리를 깊숙이 굽혀 나뭇가지 위에 눕혀진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표지가 독특한 오에 겐자부로의 『우울한 얼굴의 아이』(청어람미디어)를 만나게 된다. 인트로에 해당하는 ‘서장 - 보라, 티끌 속에서 나는 잠드리’를 읽으며 집중해 밑줄을 긋다가, ‘제 1장 - 『돈키호테』와 함께 숲으로 돌아가다’를 읽으면서는 밑줄을 그을 수 없었다. 문장과 단어의 밀도가 다양한 역사적 맥락과 촘촘하게 엮여 있고, 문장 하나하나가 삶의 깊은 통찰로부터 나오고 있어서, “내가 감히 틈을 낼 수 있을까?” 망설여졌다. 아니 소설 속 인물들의 말들에 모두 밑줄을 긋고 싶었고, 그들의 욕망과 사색 속으로 빨려들고 싶었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한 깊은 사색을 담고 있다. 서문 제목인 “보라, 티끌 속에서 나는 잠드리”라는 제목은 “중세 교회 음악 합창단과 함께 즉흥연주를 즐겨하는 노르웨이 출신의 테너 색소폰 연주가(Jan Garbarek)”의 앨범(Officium)에서 시작하지만 16세기 작곡가 크리스토발 데모라레스를 거쳐 구약의 『욥기』에 이른다.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며 죽음 앞에 선 자의 눈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앞서서 살아남은 늙은 고기토의 당당한 비애가 느껴졌고, ‘동자 이야기’를 다시 쓰기 위해 고향 마을로 돌아온 고기토가 돈키호테처럼 이리저리 좌충우돌하는 모습에서 여전히 삶과, 부조리한 사회와 맞서 싸워야 하는 고달픔을 느꼈다. 아직 일상에 매달리던 나는 그 무거움이 정말 무거웠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아름다운 크레타를 향수하며 따뜻한 유년기를 기록하는, 내면의 투쟁 속에서 언어적 감수성이 풍부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오랜만에 『우울한 얼굴의 아이』를 떠올렸다. 늙은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영혼의 자유를 찾아 유년의 감각과 자아로 돌아가는 이야기는 마치 늙음과 젊음, 삶과 죽음이 등을 맞대고 순환하는 뫼비우스 띠를 여행하는 것 같았다.
수상한 봄이 요란스러운 요즘, 『우울한 얼굴의 아이』를 펼쳐 자를 대고 가지런한 밑줄, 정교하지만 빈틈없는 틈새를 만들어 본다. “할머니로부터 ‘자기 나무’ 아래서, 어린 자기가 나이든 자기를 만나기도 한다는 이야기도 들어서 알고 있지?”(『우울한 얼굴의 아이』, 372쪽) 나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온 우주에서 나 혼자만이 눈을 깜빡인다고 느끼는 우울한 시선으로, 쨍한 생명을 움켜쥔 그의 이름을 불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