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의 창조적 지성과 셰익스피어의 절묘한 화합, 이화여대 영문학부 100주년 기념 공연

2025-03-30     김춘희(문예비평가, 연극평론가, 서울대학교 미국학연구소)
Marc Chagall의 [Midsummer Night’s Dream](1939) 요정의 여왕 타이타니아가 당나귀-보톰과 사랑에 빠진 장면. 출처=Musée de Grenoble, France

셰익스피어의 희극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이 이화여대 영문학부 10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2025년 3월 6일부터 8일까지 ECC 영산극장에서 공연되었다. 영문과의 영어연극반 BEINGS의 공연사는 1930년 이래 어언 100여년에 이르고 횟수로는 84번째 공연이다. 선후배 합동공연 형식을 취한 이번 공연의 의미를 이화인의 정신과 연결해 보고자 한다.

 

법과 사랑의 충돌:
“with his judgment” vs “with my eyes”

아테네의 테세우스 공작과 아마존 여왕 히폴리테의 결혼식을 앞둔 시점에 헤르미아의 아버지 아이게우스는 딸이 사랑하는 뤼산드로스와의 결혼을 반대하며 공작에게 아테네의 법에 의한 아버지의 ‘특권’을 허락해달라는 청을 올리자 테세우스는 헤르미아의 ‘창조자’로서의 아버지의 위상을 강조한다. 이에 헤르미아는 아버지가 “자신의 눈으로”(with my eyes) 봐주기를 원하자 테세우스는 “너는 아버지의 판단으로 보아야 한다”(with his judgment)고 하는데, 여기서 아테네의 법과 사랑의 권리가 충돌하며 제시된다.

 

사랑: 자연의 힘

제2막에서는 숲의 요정들의 세계가 펼쳐지는데 여기서도 숲속의 왕 오베론과 여왕 타이타니아의 사랑의 불화로 인한 불편한 상태가 제시된다. 숲 속으로 들어오는 디미트리오스와 헬레네 두 사람 역시 사랑에 문제가 있음을 오베론이 간파하고 ‘장난꾸러기 요정 퍽(Puck)’으로 하여금 먼 옛날 큐피드의 화살이 잘못 떨어진 꽃의 꽃잎을 따와서 그 꽃즙을 아테네 청년의 눈꺼풀에 떨어뜨리고, 그가 깨어난 후 반드시 “아테네 처녀를 최초로 보게 하여 남자가 여자를 더욱 사랑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퍽이 대상을 오인하여 숲속 두 쌍의 남녀 사랑의 구도에 일대 혼란이 일어난다. 오베론은 퍽의 실수로 “진실한 사랑은 부실해지고, 거짓 사랑이 진실을 잃었으니” 그들이 사물을 보는 힘을 회복하도록 지시하고 결국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한편, 잠든 타이타니아의 눈꺼풀에 꽃즙을 떨어뜨리고 덤불 속에 있던 보톰에게 퍽은 당나귀 머리를 씌워 타이타니아가 눈떴을 때 처음으로 보게 된 당나귀-보톰을 그녀가 정신없이 사랑하게 한다. 이것은 많은 예술가들이 즐겨 다루는 테마로서 샤갈의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다.

 

상상 시학: 이성과 사랑의 결합

제5막은 테세우스의 궁전에서 지난밤 있었던 연인들의 “너무 이상해서 믿기지 않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 이상한 이야기는 테세우스에 의해 연인들, 광인들, 시인의 상상의 영역으로 분류되고, 그의 ‘상상 시학’은 미지의 것에 형태를 부여하는 상상력과 시인의 펜은 ‘상상의 마술’이라고 규정한다. 연인들에게 아테네 법의 엄격한 적용을 설파했던 도입부에서와는 달리 테세우스의 상상력 자체가 거의 시인의 영역에 범접하는 직관력을 지닌 채 모든 문제는 결국 아테네 법의 세계와 순수한 사랑의 세계와의 화합을 통해서 해결된다.

대립으로 시작한 이 극은 ‘꿈’이 아니면 해결되지 않을 그 무엇을 말해주고 있으며, 그 기능을 수행하는 존재는 숲의 정령들이다. 연인들, 광인들, 시인의 상상의 영역에 대한 테세우스의 인식의 변화는 퀸스 일행의 소박함, 그리고 순박한 충실함에 대한 “우리들의 각별한 친절함”의 필요성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빅토리아 여왕도 번역본을 구입해서 읽었다고 하는 셰익스피어에 대한 독일의 비평가 게르비누스(G. G. Gervinus)의 “셰익스피어에겐 종교와 무관한, 자연과 이성에 기초한 도덕적 체계(moral system)가 있다”는 지적은 앞서 말한 연인들의 사랑이 의미하는 자연성으로서의 도덕 체계와 직결된다.

 

이화인의 정신과 셰익스피어의 정신

헤르미아가 소신을 굽히지 않는 사랑에 대한 ‘자신의 눈’은 관점의 영역이다. 아버지의 권리는 그것에 대한 ‘심판’으로서 절대 영역이다. 이 두 가지를 바라보는 눈은 어떤 눈이어야 할까? 여기에 이화의 정신이 소환될 필요가 있다. 진선미(眞善美) 사상이 그리스 시대의 전통 철학과 잘 맞아떨어진다고 한다면, 시대가 바뀐 지금 기존의 방식대로의 진선미가 아닌 창조적 지성을 발동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진선미를 추구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특히 진(眞)의 경우, 이 연극에서 헤르미아 아버지의 사유방식에 잘 들어맞는 법의 기초로서의 진(眞)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많은 것에 숨겨진 감정으로서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런 사랑의 질서와 법의 질서를 서로 연결하는 방법의 기초로서의 진(眞)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이 작품에서 이미 그런 화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화려한 수사학적 치장을 하면서 실제로는 그리스적 진선미의 모방에만 안주했던 사람들과는 달리, 절묘한 문제 해결 방식 속에 작동하는 셰익스피어의 창조적 정신을 이화인은 두고두고 곱씹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