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E열] 오늘을 ‘빨래’하는 우리들의 소리

2025-03-30     박소현(특교·24)
제공=박소현씨

조금은 허름한, 그러나 아주 정겨운 무대를 비추는 희미한 불빛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조금의 정적을 뚫고 들려오는 힘찬 노랫소리. 8명의 배우가 내는 소리라곤 믿기 힘들 만큼 다채롭고 분주한 소리. “서울살이 몇 핸가요?”라는 물음으로 활짝 문을 여는 이 뮤지컬의 이름은 바로 “빨래”이다.

주변에서 누구나 볼 법한, 그래서 더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소개될 때면 왠지 모르게 가슴 속에 파도가 밀려온다. 힘들게 서울 생활을 이어가는 사회 초년생 나영의 목소리는 명랑하고도 애잔하다. 옥탑방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솔롱고는 어리숙하고 용감하다. 나영과 솔롱고가 마음을 나누고 주인할매와 희정엄마에게서 ‘정’을 확인할 때, 우리 사회의 아픈 물방울들이 짧게나마 제 길을 찾아 흘러내린다.

장애가 있는 자식을 세상으로부터 꽁꽁 숨기는 주인할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 사회의 폭력성을 발견해야만 한다. 나의 아픔이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낯설어서 두렵고 께름칙한 것이 되기도 하고, 나의 사랑에 수신자가 없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하며 우리는 산다. 언제나 삐걱대는 문 뒤에서 한 평 남짓의 세상을 살아가는 ‘둘이’의 유일한 빛은 오직 주인할매뿐이라는 점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딸을 위한 빨래가 ‘지겨운’ 것이라면서도 “이것이 사는 것잉게 암시렁도 안허다”는 주인할매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제서야 나를 지탱해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리고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실감한다. 주인할매를 이렇게나 몰아세웠던 것은 사실 무관심한 사회라는 것을.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지만 누구보다 사랑하는 딸의 모습에 눈살 찌푸리는 사회의 모습을 목격한 주인할매의 마음을 감히 헤아리며 다시금 우리 사회가 얼마나 잔인한지 생각한다. 허울뿐인 제도 안에서 여전히 소외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주 짧지만 강렬한 주인할매의 넘버는, 왠지 모를 무력감이 들 만큼 많은 장면들을 그려보게 한다.

힘든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인물들의 모습은 잔인하리만치 현실적이다. “힘들게 살아가는 건 우리에게 남아있는 부질없는 희망 때문”이라는 가사는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내고 있는 모두의 목소리로 부르는 듯만 하다. 수많은 문화 예술 장르를 통해 누군가는 사랑을, 누군가는 이별을 표현하지만 ‘빨래’는 그저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속에서 누구에게도 쉬이 꺼내보지 못했던 속마음을 표현한다. 나영과 솔롱고가 참고 참으며 살아온 하루하루는 그들의 애틋한 사랑으로 이어진다. 투박한 말투 뒤에 가려진 여린 희정엄마의 마음씨는 죽네 사네 하며 살아가는 그녀만의 인생을 빛나게 한다.

우리네 삶도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치열한 경쟁률 싸움을 거쳐 수강신청한 수업을 듣기 위해 2시간 이상을 이동해서, 공강도 없이 힘들여 수업을 듣고, 대외활동을 하기도 알바를 하기도 한다. ‘대학생이라면 이 정도는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 한없이 작아지기만 한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지만 일단 전공 수업을 무작정 따라가보는 스스로가 안쓰럽기도 하다. 나에겐 잘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열정도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미워도 해본다. 하지만 아주 어린 시절, 우리는 누군가를 보며 꿈을 꾸었을 것이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었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할 수 없었을 것이고, 너무나도 멋지고 존경스러운 사람을 보며 자극도 받아보았을 것이다. 꿈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내가 꾸는 꿈은 나를 만들어가는 그 모든 길 안에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 모두 마음 깊숙한 어딘가에 꽁꽁 묶어놓았을 꿈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꿈을 잊고 사는 것을 두렵다 노래하는 나영을 보며, 나는 무엇을 꿈꾸는 사람인지 떠올린다. 바쁘고 조급하게 살아오던 우리에게 고민하고 눈물 흘리고 힘낼 시간은 허용되는 것일까. 지금까지는 아니라고 답해왔다면, 이제부터라도 ‘그렇다’고 외칠 수 는 없는 걸까. 모두에게 주어진 하루를 각자만의 방법으로 살아내는 우리는 어쩌면 누구보다 바쁘고 성실하게 살며 더 많은 것, 더 높은 곳을 향해 무의미한 경주를 해왔을 지도 모른다. 그런 우리에게 나영은 “나는 지치지 않을 거야!”라는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관객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당차고도 벅차오르는 한 마디를 허공에 내던진다. 그리고 이 뮤지컬의 아주 마지막 순간에는 “우리는 지치지 않을 것”이라는 눈물겨운 대사를 또 한 번 외친다. 그렇게 우리는 또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자신을 위해 너무나도 벅차게 살아왔을 당신, 혹 가장 소중한 것들을 잊지는 않았는가? 바람에 몸을 맡긴 빨래를 보며 떠올렸으면 좋겠다. 사람을, 사랑을, 그리고 자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