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사이] 어디서든, 무엇이든 울려 퍼질 자유
가슴께까지 오는 머리카락에 눈두덩이 다 덮는 아이라인을 짙게 그린 남자 보컬이 걸어들어온다. 채도 높은 노란 재킷과 검은색 가죽바지를 입고서, 붉은 헌팅캡은 애초에 등장용이었던지 첫 곡 만에 무대 중 떨어진다. 관객석에 눈을 치켜뜨고 한 명씩 삿대질하는가 하면, 가끔은 울부짖는 목소리에 무대를 쉴 새 없이 쏘다닌다. 주저앉아 스피커를 껴안다가도, 나풀대는 몸으로 활보하다가 픽 쓰러져도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멤버들은 보컬을 바라보며 은은하게 웃음만 남기며 연주한다. 열댓 명 될까 말까 한 관객 중 한 명만이라도 즐거우면 됐다고 말한다. 교토 모조(京都MOJO)라는 라이브하우스에서 본 ‘러그걸(ruggirl)’이라는 밴드의 무대다.
리쓰메이칸대학 경음악부에 들면서, 지난해 12월부터 부활동에서 시작된 오리지널밴드(자작곡 밴드)의 공연을 보러 다니게 됐다. 경음악부 활동에서는 보통 다른 밴드의 곡을 커버하지만, 개중에서 자신만의 밴드를 꾸려 라이브하우스에서 공연하기도 한다. 보통 하루에 4~5팀이 함께해, 친구들의 공연을 보면서 다른 밴드들도 알게 됐다. 러그걸도 우연히 보게 된 팀 중 하나다.
일본은 명실상부 밴드의 나라다. 일본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지난해와 올해는 특히 많은 일본 밴드가 속속 내한 소식을 전했다. 이렇듯 시장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메이저 밴드도 많은 나라지만, 규모를 집계할 수 없을 정도로 인디 밴드가 전국적으로 포진해 있다. 일본은 장르 불문 ‘취미 음악’의 접근성이 좋아 이름 없는 작곡가가 ‘보컬로이드’를 활용해 곡을 투고하거나, 얼굴 없는 가수가 목소리로 승부를 보기도 한다. 밴드 ‘치쿠와즈(ちくわズ)’의 쿠보 쿄스케(23)씨는 그저 “친구가 졸업하기 전에 오리지널밴드를 만들고 싶다고 권했다”는 이유로 직접 곡을 썼다. ‘슬로서프(slow surf)’의 야스다 코스케(23)씨는 대학교 2학년 시절 경음악부의 동급생이 모르는 장르의 자작곡을 만드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아 시작하게 됐다.
일본 음악은 메시지나 이미지가 다양하다. 음악 시장에 팔리는 것보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중요한 건 인디 음악의 공통점이겠지만 일본 라이브 문화는 이를 더 북돋우는 듯했다. ‘나그스(Nags)’의 코바야시 히비키(21)씨는 “일본에는 내성적인 사람이 많아 평소 하지 못한 말을 음악으로 표현하려는 것도 같다”고 말했다. 무대에서는 어떤 말이든 하고 내려올 수 있으니까. 코코로라는 이자카야를 운영하며 자기를 ‘프레시 코타’라고 소개하던 이는 출중한 기타 실력이 얼핏 수다를 위한 수단처럼 보였다.
일본은 이런 인디 밴드가 활동하기 적합한 환경이다. 도쿄나 오사카 같은 중심도시가 아니더라도 제대로 된 기재가 마련돼 있는 라이브하우스가 운영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소규모 공연 문화가 희박하고 쏠려 있다. 인디 밴드 공연이라고 하면 ‘홍대’가 자연스레 연상된다. 반대로 말하면 그밖에는 거의 활성화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음악을 하기 위해 상경한 이들도 적지 않을 거다. 지난 1년간 전국 상연횟수의 76.2%가 수도권(공연예술통합전산망, 장르 전체)이다. 씬디라운지가 지난해 발표한 ‘한국 인디 뮤지션의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인디 뮤지션은 3천168팀으로 그중 2천806팀이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다. 10팀 중 9팀 가까이나 된다. 서울에 몰린 뮤지션과 홍대 공연 문화의 발달은 닭과 달걀의 사이겠지만 홍대 중심의 인디씬이 전국적으로 충분히 퍼지지 못했다는 게 사실이다.
물론 라이브 문화가 활성화돼있다고 인디 밴드의 주머니 사정이 좋은 건 아니다. 오히려 라이브는 적자가 부지기수다. 티켓 판매 할당량(노르마)만큼 관객을 모으지 못하면 밴드가 라이브하우스에 지불해야 하는데, 회당 약15만~20만 원가량이다. 지명도를 올리기 위한 투자로 라이브를 하더라도, 그만큼 음악으로 벌어들이기 어려워 좌절하기도 한다. 오히려 별도의 수입을 가진 채 음악이 즐거워서 가늘게라도 이어가는 경우도 많다. 쿠보씨도 4월이면 회사원이 되지만 라이브하우스에서 다른 밴드를 보는 게 원동력이 돼 우선 서른까지는 밴드를 하고 싶다고 한다. 이를 보면 인디 밴드로서는 언제든 마음먹으면 라이브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위안이 되는 게 아닐까.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된 한국의 인디씬이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고 한다. 그간 한국 밴드 음악도 수많은 이야기를 써내려 왔다. 음악 시장의 파도에 자기를 내려놓고 올라탄 음악과, 휩쓸려 간 음악을 떠올린다. 자기 이야기로 정면돌파해 음악으로 ‘성공’한 밴드도 물론 많다. 최근 ‘밴드 붐’이 불었다지만 아직 한국에서 밴드를 접할 길은 방송이나 음악 페스티벌 등의 신인 밴드 발굴이나, 드물게 입소문을 타는 경우가 대부분일 테다. 그 빛을 보지 못하면 음악으로서 ‘실패’한 걸까. 잔잔한 등불 같은 소규모 공연이 모이고 쌓여, 음악을 마음 놓고 표현할 수 있는 안식처가 많아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