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칼럼] 이해와 규정을 넘어서는 ‘그리고’의 확장
“MBTI가 어떻게 되세요?”
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로서 성격 유형을 16가지로 구별하는 MBTI. 신뢰도는 차치하더라도 현대인의 상식이 된 지 오래이니, 자신이 어느 유형인지 정도는 알아 둬야 사회생활이 원활하다. MBTI 열풍에 대한 해석은 그동안 충분히 제시되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 유형화의 재미, 소속감을 원하는 청년 세대의 열망, 불확실성의 시대에 선호하게 되는 명료함, 일종의 롤플레잉, 대인관계에서 위험 부담을 피하려는 안전 욕구 등등…. 동시에 이런 유형화를 경계하며 ‘MBTI 과몰입’을 성토하는 목소리도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MBTI 유형에 끼워 맞춰서 행동하거나, 개별적 존재를 유형으로 평가하는 것은 영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이런 ‘캐해’의 인기는 쉽게 식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MBTI 이전에는 혈액형론이,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사주라는 녀석이 한반도를 아주 꽉 잡고 있었으니까. 인공지능으로도 사주를 보는 것이 현대인이다. 그만큼 ‘나’가 어떤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보이며, ‘나’는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알고 싶은 욕망은 강렬하고 역사적이다. 이러한 욕망은 ‘나’의 경계를 넘어서 세계와 타인까지 확장된다. 쟤는 왜 저럴까? 이상이 2020년도에 태어났다면 오감도는 이렇게 쓰였을 것이다. 제11인의아해가우울해서빵을샀다고그리오.제12의아해가왜우울하냐고그리오.제13인의아해가무슨빵을샀냐고그리오.13인의아해는무슨빵인지궁금한아해와그게중요하냐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철학자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탐구하고 해석하는 일은 즐겁다. 나도 몰랐던 나의 어떤 모습이 타인에게 발견될 때는 기분이 묘해지고, ‘내가 그래서 그랬구나’ 이해받는 기분이 든다. 그러다 평소의 성향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거나 어떤 관계에서만 특별한 모습이 불쑥 튀어나올 수 있다. 자칭타칭 대문자 E유형이 입을 꾹 다물고, 계획 없이 여행을 훌쩍 떠나는 사람이 시간 약속에는 예민하고, 오열하는 F 참가자가 특정인 앞에서는 지옥에서 온 T발이 되는 것이다. 소설에서 인물은 평면적 인물과 입체적 인물로 나뉜다. 평면적 인물은 성격이나 태도가 작품 안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 나쁜 놈은 끝까지 나쁘다. 입체적 인물은 작품 안에서 성격과 태도가 변화한다. 선량하던 사람이 야비해진다. 등장인물은 또한 전형적이거나 개성적이다. 전형적이란 특정 집단의 특성과 가치를 대변하는 유형이다. 그러나 이 모든 구분이 항상 무 자르듯 딱 떨어지진 않는다. 어떤 인물은 전형적이면서도 개성적이고, 끝까지 나쁜 행동만 한 사람의 진심이 공개되면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작가가 의도를 가지고 창작한 등장인물이 이렇건만, 어느 날 불쑥 세상에 던져져 무수한 변수 속에서 살아가고 매 순간 다양한 관계를 맺는 현실의 인간을 온전히 규정할 수 있을까. 사람이 16가지로 나뉠 수 없음은 자명하기에 MBTI가 스펙트럼이라는 주장은 설득력 있고, 상호작용 속에서 사회적 얼굴은 변화무쌍하게 바뀐다. ‘평소랑 다르’거나 인위적으로 연기한 모습이라도 당사자의 일부가 반영되니 고정불변의 본모습이란 환상일 것이다.
모든 이해는 결국 오해의 한 형식이라고 한다. “나는 대문자 P라서”, “나는 완전 I라서…”라는 말은 나를 설명하는 동시에 규정한다. ‘나’와 사이좋게 지내려면 ‘나’를 잘 파악해야 하지만, 규정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면, 다른 가능성을 차단하게 된다. 예를 들어 나는 오랫동안 창조적인 일은 즐기지만 단순한 반복 작업에는 취약하다고 생각했다. 택배 송장 10개를 입력하느니 글 1장 쓰는 것을 선호할 정도였다. ‘나는 이런 거 원래 못해’라는 말로 그 믿음을 강화하면서 ‘조금 느리고 서툴지만 집중하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나’에게 무능과 불능의 낙인을 찍은 채 방치했다. 해보니 생각보다 할 만했다. 또한 평소 일을 즉흥적으로 처리하는 편이라 (사실 이 원고도 마감 시간을 조금 넘긴 채 쓰고 있다, 떨린다…) MBTI 검사에서는 언제나 높은 비율로 P가 나오지만, 검사 항목에 없을 뿐 내가 매우 통제적으로 구는 분야와 상황이 있다. 그럴 때 나는 누가 봐도 깐깐한 ‘J’일 것이다. 이처럼 개인에게는 상반되는 면모가 공존하고, 치우쳤던 경향이 돌연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학기 초면 학생들에게 수업시간에 지목해서 발표를 시켜도 되는지 사전 조사를 한다. 학기 중반쯤이 되면 설문지에 X를 쳤던 학생이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발표를 시작하는 순간이 온다. ‘나는 이런 거 못하는 사람이야’를 무너뜨리는 눈빛이 새로운 잎을 틔우는 것 같아서, 보는 사람이 다 설렌다.
번역가 노지양은 영화 <인사이드 아웃2>의 대사를 예로 들며, 부정적인 단어와 긍정적인 단어가 항상 ‘그러나’와 ‘하지만’ 같은 접속사로 이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라일리는 엉망이지만 아름답거나, 아름답지만 엉망인 것이 아니라 “엉망이고 아름다운 조각들(Every messy, beautiful piece of her)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은 모순적이고, 어제는 인간이 다 싫었지만 오늘은 나를 안으라고 하고 싶어지고, 죽고 싶은 와중에 떡볶이는 먹고 싶은 ‘그리고’의 존재니까. ‘나는 이런 사람이라서 그렇다.’ 이것은 이해의 언어다. 개연성이 있지만 다소 폐쇄적이다. ‘이런 사람이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이것은 확장의 언어다. 어떤 상태에 고착되지 않은 채 끝없이 가능성과 선택지를 추가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오랫동안 나의 진실이라고 생각했던 명제를 놓고 그 반대의 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떠올려보자. 입체적이고 종잡을 수 없는 나를 탐색하는 과정은 아주 즐거울 것이다. 그레이의 그림자만 50가지일 리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