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E열] 흙은 죽음이면서 생명이고, 위험하지만 혐오가 없다
영화/괴물(2023)
이 영화를 보고 누군가를 속단했던 섣부름을 반성하거나 말을 옮기지 말자는 다짐을 하고 싶지 않다. 혹은 훗날 교단에 선 나에 대해 아무런 소문이 없도록 나의 제자는 모두 ‘착한 아이’였으면 좋겠다고 소망하고 싶지도 않다. 이 영화를 볼 때 나는 늘 누가 잘못을 저질렀는지 골라내는 범죄 심리학자의 눈이 아니라 감정에 온몸을 맡긴 초등학생의 눈을 하게 된다. 아이들은 천천히 자라나고 감정은 빠르게 증폭된다. 팽창 상태의 감정을 작은 몸 이곳저곳으로 삼킨 채 밤 동안 뒤척거리며 성장한다. 어떤 팽창한 감정 앞에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고, 잘못한 사람이 잘못한 것이 없는 사람에게 사과한다고, 재발의 방지를 약속한다고, 그렇게 어른들이 해결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하고 나도 달라질 것이 없다. 미나토가 원한 것은 검은 옷의 교사들이 일제히 땅을 쳐다보다 일어나서 학부모들에게 사과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일로 마음이 나아진 사람은 미나토의 엄마뿐이었다. 정말로 미나토의 감정을 어루만진 것은 요리와의 대화, 세상과 달리 과묵한 터널 너머, 교장 선생님과 부는 트럼펫, 그리고 거꾸로 쓰는 글씨들이었다.
미나토는 요리를 만나며 생긴 낯선 충동을 버거워한다. 그는 요리가 쓰다듬은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었고, 자신도 돼지의 뇌를 가졌다고 믿었고, 화장실에 갇힌 요리를 모른척했다. 또 다른 날에는 요리를 껴안고 싶었고, 그에게 돼지 뇌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고, 달리는 차 안에서도 태풍이 불었어도 요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미나토의 이런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그만한 내면의 자연재해를 겪고 있는 이들이다. 영화에서는 이를 ‘뒤집히는 병’이라 표현한다.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해온 요리는 미나토에게 거꾸로 글씨 쓰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거꾸로 쓰는 글씨는 훨씬 자유로워 빈 종이에 혼자 힘으로 진심을 적어야 하는 아이들의 연필 잡은 손에 깃든 두려움을 달래준다. 호리 선생님이 키우는 금붕어는 뒤집히는 병에 걸렸고, 그렇기에 그만이 거꾸로 쓰인 글씨를 알아보고 아이들을 찾으러 나설 수 있었다. 미나토와 요리는 신발을 한 짝씩 나눠 가졌고, 학교와 언론의 비판에 상처받아 지붕에 오른 호리 선생님의 왼발에도 신발이 없다. 교장 선생님은 손녀의 죽음에 대한 거짓말 이후 줄곧 허망함 속에 살았고, 그런 그녀가 미나토에게 건넨 것은 트럼펫이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트럼펫을 입술에 가져다 대지 않고서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생각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교장 선생님과 미나토가 부는 음악에는 침전물 같은 감정이 느껴진다. 어쩌면 그 소리를 듣고 지붕에 올랐던 호리 선생님은 도로 삶으로 내려와 내일을 기약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각자 마음속에 폭풍이 있어 어리석어 보이지만, 결국 서로의 폭풍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들이다.
미나토와 요리는 괴물 놀이를 한다. 이마에 제시어를 붙이고, 질문을 주고받은 끝에 동시에 자신의 제시어가 무엇인지 말한다. 요리는 제시어 ‘돼지’를 하늘을 볼 수 없는 동물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까치발을 들어 나무에 열린 열매를 따고 놀며 놀이터에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서 하늘을 쳐다본다. 아이들 스스로 돼지 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사랑에 기반한다. 나무늘보에 대해 공격당하면 몸에 힘을 풀고 포기해버리는 게 독보적인 무기라 설명하자 미나토가 “이것은 호시카와 요리인가요?”라고 하는 모습에서 영화관은 이 아이들의 진솔한 위로가 조성하는 따뜻한 공기로 가득 찬다.
아이들에게 흙이란 무엇일까. 흙은 사라진 것들을 새로 태어나게 해준다. 아이들은 죽은 고양이를 발견하고, 이곳에 두면 다시 태어날 수 없다며 시체를 옮겨 그 위로 흙을 덮어준다. 요리는 이것은 이제 고양이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죽음을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이입하는 것이다. 죽은 고양이라는 개념은 살아 있는 생명이 그것을 관찰할 때만 성립한다. 이미 죽은 고양이에게는 자신이 고양이였다는 사실을 인식할 방법이 없다. 요리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죽음을 느껴왔을지, 어쩌면 당연하게 여겼을지 모른다. 그는 흙을 덮어 불에 태우거나 그게 아니라면 우주가 붕괴해야만 새로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요리는 새로 태어나기를 바랐을까? 몸집 작은 어린이에게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 있었을까? 결국 흙은 미나토와 요리를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데려가 바라는 모습으로 있게 해주었다. 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웃었고 그들이 달리는 길은 거짓말처럼 푸르렀다. 그때 들려오는 Aqua(1999)는 아이들의 치열하고 충동적인 감정을 빠짐없이 끌어안는 대자연 같았다. 아이들의 온몸을 덮은 흙은 죽음이면서 동시에 생명이었고, 위험하지만 혐오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도 고통 속에서 자신만의 흙을 찾아 승리의 깃발을 꽂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