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칼럼] 타자들의 광장으로 나아가기

2024-12-15     황지선 국어국문학과 BK 연구교수

“이 행성에 깃들인 사람들과 생명체들의 일인칭을 끈질기게 상상하는, 끝끝내 우리를 연결하는 언어를 다루는 문학에는 필연적으로 체온이 깃들어 있습니다.” 한강은 노벨문학상 수상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자의 일인칭을 상상하는 것은 공감 행위를 초과한다.

타자를 독립적 존재로 두되 ‘나’처럼 생각하는 일은 곧 내 안에 숨어있던 타자를 대면하게 한다. 이는 내 경험만이 유일한 진실이 아니며 나는 오로지 나로만 구성되지 않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일인칭 주체의 권위를 파괴하고, 나와 타자가 서로에게 결부되어 있음을 상기한다.

12월 3일 밤, 우리는 ‘완전한 나’의 환상이 가장 위험한 방식으로 표출되는 광경을 보았다. 계엄은 우리를 70년대나 80년대 언저리로 회귀시키는 듯 했으나 이는 명확히 2024년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이 나라와 국민 모두가 본인에게 종속된다고 믿는 전 통수권자는 민주주의 시스템의 파괴도 (자신을 위한) 통치라고 말했다. 자신의 일인칭만으로 세상을 보며 그 일인칭 화자의 발언만이 진실하다고 믿는 자에게 타자와의 협상 과정은 불필요한 일이었다.

요즘 우리는 어느 정도 불통의 사회 속에 살아간다. 나와 다르기에 불편하고 알 수 없는 것은 확실하게 외면하는 게 쿨한 태도가 되기도 한다. 예컨대, 최근 대중 문화, 교육, 정치 등 다양한 영역에서 선호하는 명쾌한 태도와 사이다 서사는 불편한 타자를 들여다보는 골치아픈 일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사회적 무의식을 반영한다. 이 험난한 현생에선 나를 소중히 돌보는 것조차 힘들다. 문제는 그러한 소거의 방식이 나 아닌 것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통해 이루어지며 이를 정상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데 있다.

혐오는 강력하고 전능한 주체가 되고 싶은 자가 내 안의 가장 유약한 부분을 꺼내 다른 존재에게 떠맡길 때 발생한다. 이는 노력하지 않고도 온전한 존재가 되는 방법이다. 혐오하는 순간 나는 그들과 다른 정상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 정치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해왔다. 나와 다른 자를 배척하여 반국가세력으로 규정하는 혐오 정치가 있었기에 윤석열 대통령도 가능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엄과 두 번째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개인의 일탈이 아닌 정치 시스템 자체의 문제로 사유해야 한다.

광장에 나온 존재들을 살피면 현 한국 정치가 누구를 혐오의 대상으로 설정했는지를 알 수 있다. 주디스 버틀러는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는가?’에서 새로운 우파가 젠더를 공격 목표로 삼아 허상(Phantasm)을 투영하며 증오와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 이 아래 여성, 성소수자, 이주민, 난민 등 취약한 타자는 역설적이게도 국가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탄핵 시위의 주축이 된 2030 여성들은 페미니즘을 악마화한 우파의 판타즘에 맞서 무엇이 진정 민주주의를 붕괴시켰는지를 말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를 복권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 문제 제기의 양식이다. 투쟁가와 민중노래 대신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유행가를 외쳐부르고 가장 빛나고 소중한 응원봉을 흔든다.(국회의원들의 손에 하나씩 들려버리기까지 했다!) 선결제와 유튜브 라이브를 통해 광장에 없어도 광장에 있는 자들과 연대한다. 이 따뜻하지만 단호한 움직임은 다층다양한 국민들을 허물없이 자유롭게 한데 모으는 중요한 구심점이 되어줬다. 그리고 이제 경직되고 폐쇄적인 한국 정치의 현장을 비판하며 정치가들의 응답-능력을 시험하는 중이다.

수업을 하면서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채 반복되는 역사적 사건들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는 마치 한국 사회의 실패처럼 보이지만, 실패는 부정적 현실을 꿋꿋하게 디디고 서서 새로운 가능성을 논의했던 용감한 자들과 우리의 연결고리를 상기시킨다. 우리는 이 타자들과의 연결을 등불삼아 나아갈 수 있다.

아직 끝이 아닌 이 광장에서 절망하거나 냉소하지 않고 매번 다시 만나기를 약속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