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E열] 우리는 아직도 ‘그’와 변치 않는 사랑을 꿈꾼다
드라마/사랑 후에 오는 것들(2024)
요즘 사랑받는 사랑 이야기는 무엇인가? 얼핏 듣기로는 구교환 씨와 이제훈 씨의 영화가 주목 받는 것 같고, 드라마에서는 선재라는 이름의 남주인공이 부상하는 것 같다. 그런데 진짜 지금 인기 있는 건 그게 아니란다. 이것도 지나고, 저것도 지나고, 이제 정말로 ‘켄타로’란다. 켄타로 씨는 누구인가, 맑고 산뜻하고 부드러운 소년미의 일본 국적 남배우다. 아하, 또 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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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다고 믿어요?
일본 유학 중이던 ‘홍(이세영)’이 ‘준고(사카구치 켄타로)’를 만나 애절한 사랑과 이별을 겪은 후 5년 만에 한국에서 다시 재회하면서 펼쳐지는 ‘운명적인 사랑’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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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후에 오는 것들’은 모두가 한 번은 그려보았을 운명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개찰구 앞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해, 결코 대단치 않은 자연스러운 마주침 끝에 사랑에 빠지고, 옥상에서 밤하늘을 보며 윤동주의 시를 외는 낭만의 순간들을 함께한다. 그리고 헤어진다. 거의 모든 연인의 끝이 그렇듯이. 시간이 흘러 홍과의 이야기를 소설로 펴낸 준고는 한국 출판사에서 일하는 홍과 다시 마주하고, 그때보다는 조금 더 삭막해 보이는 이들의 얼굴에는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서로 다른 국적의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 빠지는 드라마는 최근 일본에도 있었다. ‘아이러브유(Eye Love You)’. 배고픔에 예민한 일본인 여주인공 유리, 생활비를 벌고자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국인 유학생 남주인공 태오. 여기서도 남주는 부드러운 태도와 배려심이 돋보이는 착한 남자다. 어쩐지, 비슷하다. 준고는 말수가 없어서 때로 답답하지만 부드러운 말씨와 수줍은 미소를 지닌 착한 남자다. 거칠고 강압적인 모습은 일절 보이지 않는다. 타국의 섬세한 남자, 태오와 준고는 현대 여성들이 바라는 동등하고 섬세한 관계를 보여준다.
원래 멜로는 그랬다. 재수 없지만 사연 있는 재벌 남주가 2000년대를 휩쓸었듯이 ‘남주’에도 유행이 있다. 수십 년이 지나도 한 여자를 기다리는 늑대소년의 등장 이후로, 초능력으로 위험한 순간마다 나타나 구해주는 외계인, 수백 년을 공허하게 살아오며 신부를 기다린 도깨비가 있었다. 어느 순간에는 조선 시대의 왕이었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멸망이기도 했다.
어쩌면 많은 여성들이 더 이상 현실에서의 로맨스를 꿈꾸지 않는지도 모른다. 재벌 3세가 내게 반할지도 모른다는 로망을 버린 지금, 그 로망은 과거 시대의 남자에게로, 늑대의 피가 섞인 남자에게로, 외계인에게로, 도깨비에게로 뻗어 나갔다. 이제 남주는 가부장적 태도와 권위적 모습을 사라지고 무조건적인 헌신과 사랑을 보여준다. 우리가 바라는 ‘완벽한 남주인공’은 점점 더 현실로부터 유리되었다. 그런데 요즘은, 다르다.
요즘 남주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선재 업고 튀어’의 선재, ‘눈물의 여왕’의 백현우,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의 준고처럼. 대신에 부드럽고, 부드럽고, 부드럽다. 드라마 화면은 한 여자를 철저하게 사랑하는 남자의 눈빛을, 섬세하게 쏟아내는 사랑의 언어를 보여준다.
이제 여성은 경제적으로 독립했고 자기 주도적인 삶을 추구하며, 상호 존중을 기반으로 한 관계를 원한다. 이런 심리는 드라마 속 남주인공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전의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은 여성들을 구원하거나 보호하는 역할에 머물렀다. 마찬가지로 여주인공은 수동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이제 여성들은 남주에게 ‘동등함’을 기대한다. 현대 드라마 속 여성들은 주체적으로 사랑을 선택하고, 관계의 방향을 이끌어나간다. 홍과 준고도 마찬가지다. 한쪽의 구원과 한쪽의 희생이 아니며, 사랑은 서로의 성장이다. 준고는 돈이 많지도 않고, 초능력을 가진 판타지적 존재도 아니다. 그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제 더 이상 남주는 구원자의 역할이 아니다. 어딘가 마주할 사랑에서의 깊은 유대를 꿈꾸며, 그저 사랑하고 사랑받는 두 남녀가 있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러한 로망이 남아 있다.
글을 쓰는 11월27일 아침에는 첫눈이 펑펑 쏟아졌고, 이 드라마의 마지막 화에서도 그랬다. 네모난 화면에서 눈이 내렸는데, 고개를 돌리니 네모난 창문에서도 눈이 내렸다. 그리고 “사랑에 결말이 있을까?”하고 등장인물이 물었다. “변치 않는 사랑이 있을까?”하고 물었다.
멜로드라마의 양상은 시대와 함께 변화해 왔다. 그렇지만 여성들이 바라는 사랑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 이제 남자주인공은 더 이상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구원자가 아니지만, 함께 성장하는 파트너다. 준고와 홍은 서로의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 마음을 두드리며, 공명하고, 사랑한다. 첫눈이 내리던 날, 드라마 속 인물이 묻던 질문은 어쩌면 현대를 사는 우리의 질문이다. 시대가 변해도 우리는 여전히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런 사랑을 꿈꾸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그’와 변치 않는 사랑을 꿈꾼다. 현실에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섬세한 성장을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