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연(緣)] 어제와 내일 사이 오늘을 삽니다
신문방송학과를 1989년 졸업했다. 사진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프리랜서 에디터, 시민단체 활동가 등을 거쳤다. 현재 진로상담전문기관인 공공선연구소와 한국그릿진로협회 대표로서 청년과 취약계층 등의 진로상담과 취업 지원을 맡고 있다.
더 멀리 바라보았어야 했다. 포기가 빨랐다. 20대 초반 열정을 쏟은 사진기자의 꿈도, 20대 후반 육아를 병행하며 시작한 프리랜서 에디터로서 경력도, 30대 후반 생명 사랑을 실현하고 싶었던 시민단체 활동가로서의 사명도. 9개 직업을 경험하고 40대 후반이 돼서야 곳곳에서 끊어진 나의 길들을 마주했다. 실패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의 끊어진 시간과 당시의 노력은 어떤 의미로 미래의 나에게 닿는 것일까? 그때야 진로가 제대로 보였다. 어제와 내일 사이의 오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진로는 애초에 작은 샘물에서 시작돼 지류를 만나는 강물과 흡사했다. 갈래갈래 소폭으로, 때로는 큰 물줄기로 흐르던 냇물이 다른 냇물을 만나 강물이 되고, 바다를 향해 가는 것과 유사했다. 강원도 태백의 검룡소에서 발원해 골지천으로 흐르다 오대천, 중랑천 등을 만난 한강처럼. 그렇게 모인 강물이 서해로 흐르는 것처럼. 나의 다양한 특성이 새로운 환경을 만날 때마다 크고 작은 변화를 끌어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면서 경력을 만들고 어떤 목적지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생애역할 변화가 만들어 낸 진로 전환
지나고 보니, 대나무의 마디가 생기는 것처럼 나의 진로에도 뚜렷한 경계가 있었다. 생애주기에 따른 역할의 변화가 만들어 낸 전환점이었다. 학생의 역할에서 사진기자로서의 사회초년생 생활은 다양한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했다. 결혼과 육아로 주어진 배우자와 부모로서 역할은 나의 본성을 마주하게 했다. 헛된 욕망과 정제되지 않은 여성주의, 낮은 자존감 등 진짜 나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에디터로서 수많은 사람을 인터뷰하고 글을 다듬으면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방향을 찾았다. 시민단체 활동가의 일상은 생명을 살리고, 사회정의를 꿈꾸게 했다. 창업을 통한 1인 기업 운영은 함께 만드는 좋은 기운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우며 가치가 통하는 사람들을 비영리단체로 조직하는 연대의 시간이었다.
지금 나는 50대 후반이 됐다. 진로 전문가로 진로 장벽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지원한다. 의사결정과정에서 혼란을 겪는 청년, 문화충돌로 직업 적응이 어려운 북한이탈주민, 진로 자본이 부족한 장애인 등을 위한 취업 지원,발달장애인과 부모를 위한 진로 교육, 다문화 청소년 진로상담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우리의 강산을,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세상의 공정을 카메라에 담고, 글로 엮어냈으며, 차별과 편견에 맞선 시간이 만든 오늘이다. 대체로 만족스러운 어제가 있어 가능한 오늘. 물론 새로운 지류를 만날 때면 장벽에 부딪혀 물길을 역류하기도 했다. 세상의 고민을 몽땅 짊어진 것처럼 성장통을 겪기도 했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방황하고, 능력이 부족해 눈물을 쏟기도 했다. 가야 할 방향을 잃고, 길거리를 배회하기도 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성과가 나지 않는 답답한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했던 아쉬운 순간도 있었다. 중국의 모소 대나무처럼 아주 살짝 싹을 틔우고선 수백 미터의 뿌리를 내리는 긴 시간이 지나서야 폭풍 성장한다는 것을 믿었다면 고통스럽지 않았을 시간도 많았다. 대나무 마디와 같았던 진로 전환점은 실패 아닌 성공담, 성공 아닌 실패담이 뒤섞여 만들어진 결정체였다. 헛된 시간은 없었다. 모두가 자양분이었다. 중요한 것은 전부 나의 선택이었다는 사실이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진로
매년 연초가 되면 나를 내담자로 삼아 스스로 진로상담을 진행한다. 5년 전부터 시작한 일이다. 몇 가지 심리검사를 실시한다. 결과를 분석하며, 작년과 달라진 나를 돌아본다. 정체든 변화든 상황을 만든 계기가 무엇인지 자문해 본다. 이어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묻는다. 그리고 나를 이끄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간다.
한강으로 모여든 냇물이 처음부터 서해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 있는지 알았겠는가? 이끌림, 순리대로 흘러왔을 것이다. 하지만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거센 힘이 생긴다.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이 확실해진다. 내게도 진로는 그렇다. 아무리 내일을 손에 쥔 것처럼, 진로 목표를 세우고, 치열하게 내일을 준비하더라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의 상태가 뒷받침되지 않아 고인 물처럼 말라버린 적도 있었다. 뛰어넘기 힘든 장벽을 만나 역류하기도 했다. 그래서 포기가 잦았다. 이제는 다르다. 포기하지 않는다. 진정 내가 원하는 것, 가야 할 목적지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돌아봄을 통한 내다봄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지금의 나를 돌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을 산다.
만약 확신이 들지 않아 진로 결정을 머뭇거리고 있다면 주저 없이 가보라고 말하고 싶다. 가다가 자꾸 의심이 들어도,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계속 자신을 이끈다면 끈기를 갖고 지속하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이겨낼 힘을 스스로 갖고 있을 테니까. 먼 훗날 그 시간의 의미를 찾을 자신을 믿으면 된다.
최정은 (신문방송·89년졸) 공공선연구소·한국그릿진로협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