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사이] 기억의 끝에서 관계를 외치다
치매인이 가족과 함께 관청이나 지원센터를 갈 때면 행정 직원은 가족에게 말을 걸고, 명함을 건네고, 설명을 이어간다. 만일 치매인과 얘기한다면, “상태 어떠세요? 곤란한 건 없나요?”라는 말로 시작한다. 일상의 안부부터 묻는 사람은 드물다. 상대와의 소통에 있어 당연한 것이지만, 병명이 붙은 것뿐으로 태도가 바뀌어버린다. 치매 당사자 탄노 토모후미(탄노·50·남)씨는 당사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치매를 포함해 ‘장애인은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애인에게 먼저 인사를 걸어주세요. 장애인에게도 명함을 나눠주세요.”
청강 중인 미디어 전공수업에서 인지증(치매) 당사자로 활동 중인 탄노 씨와 야마나카 시노부(야마나카·47·여)씨를 화상으로 만났다. 탄노씨는 ‘오렌지 도어’, 야마나카씨는 ‘데이서비스 해피’라는 시설을 열어 치매 당사자들이 서로를 지지하는 ‘피어 서포트’ 활동을 하고 있다. 상담자와 내담자 모두 치매 당사자라,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탄노씨는 수업 강사이자 전 아사히신문 기자 이쿠이 쿠미코(이쿠이)씨의 십년지기 취재원이기도 하다. 이쿠이씨는 40년 기자 생활 절반 넘게 생명·의료 현장을 누비며 ‘당사자의 힘’을 기사로 전하는 데 힘썼고, 학생들에게도 이를 느끼게 하고 싶어 두 사람을 수업에 초청했다.
“치매의 시작이 인생의 끝은 아니다.” 단순해 보이는 한마디를 알리기 위해 탄노씨와 야마나카씨 등 일본의 치매 당사자들은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왔다. 드라마나 기사를 보면 치매에 대한 공포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가족도 친구도 기억하지 못하고, 길 잃고 방황하거나 난폭한 행동을 하는 이미지다. 치매 본인의 이야기보다, 그를 돌보는 가족이나 의료진의 곤란함이 더 많이 비쳐 왔다. 무엇보다 치매가 본인과는 먼일이라고 느껴, 타자화하는 시각이 만연하다. 아직 젊다면 자신이 아니라 ‘내 주변 사람이 치매에 걸린다면’이라는 걱정을 하는 사람이 많을 테다.
애초에 ‘치매’는 어리석을 치(癡)에 어리석을 매(呆)를 쓴다. 의사 결정도, 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치매가 당사자를 향한 혐오표현이라는 이유로, 일본에서는 2004년부터 인지증(認知症)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야마나카씨는 용어에 따라 20년 전과 지금의 인식 변화를 크게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2021년 보건복지부가 실시한 인식 조사에서 43.8%가 치매 용어에 거부감이 든다고 응답했으나, 이유는 달랐다. ‘치매라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응답이 60.2%로, ‘환자를 비하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는 7.6%에 그쳤다. 같은 조사에서 용어를 바꿔야 한다(21.5%)보다 유지해야 한다(27.7%)가 더 높기도 했다.
치매인도 자신의 의사가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놓치기 쉽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정하게 해주세요.” 탄노씨는 치매인이 휴대전화와 지갑을 갖고 외출에 익숙해지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나가지 못해 욕망이 쌓이거나 외출에 자신감이 떨어지면 오히려 배회 확률이 높다고. 탄노씨의 아내는 “걱정하지만, 믿고 있으니까”라고 말해준다. 자신을 믿어주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물론 치매에 걸리면 한동안은 절망적이다. 특히 노년기 치매와 청장년기 치매는 곤란을 겪는 부분이 다르다. 탄노씨는 39세 나이에 자동차 회사에서 영업사원으로 활약하던 중 알츠하이머병을 진단받았다. 그는 앞으로 아무것도 못 하게 될까 봐 두려워 1년간 매일 밤 울며 지새웠다. 야마나카씨는 세 아들을 둔 싱글맘으로, 6년 전 장남의 대학이 결정 난 시기에 진단받았다. 아들의 학비는 어쩌지, 앞으로 일하지 못하면, 돈을 벌지 못하면, 생활하지 못하게 되면 어쩌지. 치매인이면서도 가족을 지켜야 하는 가장인 것이다.
다행히 그들은 치매 소식을 밝히고도 원래 직장에서 일할 수 있었다. 치매 이전의 모습을 주변인들이 인정해 준 것이다. 야마나카씨는 그만두겠다고 하자 회사에서 남아주길 바란다고 했다.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돼, 안 되면 뭔가의 대책을 찾으면 돼.” 탄노씨도 치매 진단 이후 11년, 같은 회사에서 계속 일하고 있다. 그는 치매 이전, 성실하고 꽤 우수한 사원이었다. 지금은 상사의 얼굴을 못 알아보더라도, 물어보면 잘 알려줘 괜찮다고. 두 사람은 입을 모아 “지금 주변 관계를 소중히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비록 치매가 아니더라도, 인생의 굴곡은 언제 찾아올지 모르니.
치매는 예방보다 대비라는 말이 더 좋다는 탄노씨. 예방이라고 하면, 예방하지 않아서 걸린 ‘나쁜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우연히 젊을 때 걸릴 수도 있고, 세월의 흐름에 기억력이 감퇴하는 것을 막지 못할 수도 있다. 고령사회에 치매는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다. 그렇기에 치매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고, 치매인이 자기 나름의 삶을 살 수 있는 ‘치매 배리어프리’ 논의도 필요하다. 과거의 치매와 달리 지금은 스마트폰으로도 기억력을 일부 대체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금의 관계, 지금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대비다. 기억은 사라져도, 관계는 남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