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교육을 넘어 주체적 인간으로 자리 잡기까지, 여자대학의 가치
편집자주 | 여자대학(여대) 탄생 배경에는 과거 열악했던 여성 교육 환경이 존재한다. 2021년 기준 대학 진학률이 여성 81.6%, 남성 76.8%로 여성이 앞서면서, 과거와 비교해 여성 교육권이 보장되고 있다. 21세기 한국에서 여대는 여성 교육을 넘어 그 이상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이대학보는 여대 공학 전환 논의에 앞서 우리 사회에 여자대학, 총여학생회 등 여성만을 위한 공간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어떤 공간으로 자리매김해야 하는지 전문가와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11일(월)부터 시작한 동덕여대 공학 전환 반대 시위가 21일(목) 잠정 중단됐다. 동덕여대 공학 전환 논의 사태는 여대의 필요성 논쟁에 불을 붙였다. 동덕여대 총학생회(총학)는 20일(수) 학생총회를 열어 공학 전환 찬반 투표를 진행했다. 1973명이 투표에 참여했으며, 2명의 기권표를 제외하고 1971명이 반대해 부결됐다. 학생총회에서 있었던 공학 전환 찬반 투표는 본관 앞에서 거수투표 형식으로 이뤄졌다. 이후 동덕여대는 21일(목) 총학과의 약 3시간 면담 끝에 남녀공학 논의를 중단했다고 밝혔다.
위기 속 여성 교육의 요람
여대는 여성의 대학 진학이 어렵던 시절 여성 교육권 보장을 위해 처음 문을 열었다. 1836년 미국에서 세계 최초 여대인 조지아여대(Georgia Female College·현 웨슬리언칼리지·Wesleyan College)가 설립된 지 50년 만인 1886년, 우리대학의 전신인 이화학당이 설립됐다. 이화학당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에는 30개에 육박한 여대가 개교했다. 그러나 1978년 수도여대(현 세종대)를 시작으로 성심여대(현 가톨릭대), 상명여대(현 상명대) 등이 공학으로 전환됐다. 점진적으로 여대가 감소한 결과 존속 중인 여대는 4년제 7개교, 전문대 7개교로 14개뿐이다.
남아있는 여대들도 공학 전환 위기를 겪었다. 숙명여대는 2015년 일반대학원에 남학생을 입학시키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동문과 재학생의 반대로 무산됐다. 현재는 숙명여대 특수대학원에 한해서만 남자 신입생을 받고 있다. 성신여대는 ‘2025학년도 전기 외국인 특별전형 신·편입학 모집 요강’에서 “국제학부에 한해 남녀 구분 없이 모든 성별 지원이 가능하다”고 표기하기도 했다.
여대의 점진적 소멸은 여대 무용론과 맞닿아 있다. 여성들의 교육 환경이 개선된 지금은 여대의 존재 자체가 역차별이라는 주장이다. 여대 무용론과 여대들이 맞닥뜨린 공학 전환의 기로에 대해 덕성여대 김주희 교수(여성학과)는 “여대 공학 전환의 문제는 여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 교육 전반의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여대의 공학 전환은 특정 대학의 구조적 변화에 그치지 않고 여대의 창학이념에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여대는 일시적으로 성차별이 없는 것 같은 기시감을 만들어내나, 이러한 기시감이 환상임을 인지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대는 어떤 교육 공간보다 날카롭게 성차별을 인식한다는 찰나적 해방성에 취하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는 대학 안팎의 성차별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말하는 여성을 위한 공간의 가치
여전히 성별 격차가 존재하는 한국 사회에서 여대가 갖는 의미는 크다. “누군가 여대의 존재가 역차별이라고 한다면, 현존하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이뤄져야 하는 권리 신장에 대해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동덕여대 재학생 ㄱ(커뮤니케이션콘텐츠 전공·22)씨는 “여대라는 공간에서 보다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하며 여성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학대학을 다니다 수능을 다시 보고 동덕여대에 입학한 그는 “공학과 여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적대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동덕여대 필수 교양인 <국어-토론 수업>에서 성매매 합법화를 두고 토론을 진행하며 페미니즘과 여성 문제의 현실을 공격당할 걱정 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ㄱ씨는 “반페미니즘 정서가 팽배한 한국에서는 공개적 장소에서 얼굴과 신상을 드러낸 채 관련 논의를 하기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며 “여대에선 여성 의제와 현실적 성차별은 물론,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고용 현황과 취업률 등 모든 이야기가 여성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이 당연했다”고 여성을 위한 공간의 가치를 이야기했다. OECD 국가 중 유리천장 지수가 최하위에 머무르는 한국 사회에서 여대는 여학생들에게 주체가 되는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ㄱ씨는 신원이 특정될 때 받게 될 불이익을 우려해 익명을 요청했다.
ㄱ씨는 “여대는 여성을 넘어 사회에 긍정적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며 “여대의 존재로 말미암은 권리 신장 운동은 사회 전반의 인권 의식을 향상시키고, 모든 차별 당사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전파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여대는 재학생들이 성별에 얽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한다. 우리대학 졸업생 이예림(정외·23년졸)씨에게 이화여대는 안전함 속에서 배울 권리를 온전하게 누리며 무엇이든 꿈꿀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학교 어디에서나 누워 있어도, 밤을 새고 나와도 한 번도 무서웠던 적이 없다”며 “오히려 나와 같은 벗들이 있었기에 의지가 됐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축구 동아리에서 선수로 뛰었던 경험과 학생회 경험을 회상하며 “무엇이든 당연하게 했던 경험들이 쌓여 자신감이 됐다”고 말했다. 자신의 한계를 확장하며 최초의 길을 열어가는 이화의 선배들도 그에게 ‘무엇이든 꿈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줬다. 신채연(영문·20)씨도 우리대학에 다니며 가감 없이 목소리를 내고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는 경험을 했다. 신씨는 “여대는 학생들이 사회인이 되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험할 수 있는 여성 중심의 사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