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편집국] 여대의 소멸, 존재의 개방
매일 같이 학생들이 드나들던 정문에 합판이 놓였습니다. 합판에 빨간 라카로 적힌 글씨는 피눈물이 연상되듯, 피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 서 있는 누군가가 연상되듯 어딘가 처연한 느낌마저 듭니다. 합판에는 “소멸할지언정 개방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8일 이대학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여느 때와 다름 없이 핸드폰을 하염없이 만지작거리고 있었습니다. 다음주 기삿거리를 생각하며 이것저것 찾아보던 중, X(구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에 ‘동덕여대’가 올라온 것을 보고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바야흐로 여성혐오와 안티 페미니즘의 시대, 페미니즘 그 자체를 상징하는 여자대학이 어딘가에 오르내리면 항상 썩 유쾌한 이유에서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아는 게 힘이라고 굳게 믿고 살아온 까닭에 곧장 동덕여대의 소식을 확인했을 때, 총체적으로 모든 것이 잘못돼 어떠한 생각도 들지 않는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공학 전환이 눈앞에 닥친 동덕여대 학생들에게 생각은 부차적인 일이었을 뿐, 움직여야만 했습니다. 총력대응위원회와 같은 조직이 구성돼 시위가 체계화, 조직화되기 이전부터 동덕여대 학생들은 각자 투쟁에 나섰습니다. 여대의 소명은 소멸일지언정 개방은 아니라는 학생들의 외침과 명애(예)롭게 폐교하고 싶다는 그들의 바람이 이대학보의 기자들에게도 닿았습니다. 그렇게 이번 호에 동덕여대의 공학 전환 철회 요구 시위를 담게 됐습니다.
이대학보는 기사의 발행 여부를 결정할 때 ‘독자와의 연관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 이대학보를 읽는 독자는 대개 ‘이화여대’라는 공통된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에 이대학보에 실리는 기사는 이화여대와 연관된 게 일반적입니다. 그렇기에 타 대학의 소식을 담는 건 일반적이진 않습니다. 그러나 이화여자대학은 이화만으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교차하는 정체성 사이 단연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획은 ‘여자’대학이라는 점입니다. 한국 여성사를 논할 때 이화여대는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했고, 여성 교육의 산실로서 그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같은 이유에서 소멸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동덕여대의 상황을 모른 척하는 건 되려 이화여대의 학내 언론으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대학보와 마찬가지로 많은 여성이 개인 혹은 단체로 동덕여대와 연대하고 있습니다.
동덕여대 시위로 말미암아 한국 사회는 변화하고 있다는 확신이 듭니다. 그래서 인식적 변화만큼이나 제도적 변화가 기대되는 요즘입니다. 10월15일은 이 기대에 약간은 부응하는 날이었습니다. 10월15일 있었던 진주 편의점 폭행 사건 2심에서 재판부는 여성혐오를 범행 동기로 인정했습니다. 19시간마다 1명의 여성이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 파트너에 의해 죽거나 중상을 입는 한국에서 여성혐오를 사법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사례입니다. 사회 변화를 위해 어떨 때는 제도적 개선이 인식적 개선에 선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10월15일의 판결이 모든 변화의 기미처럼 느껴졌습니다.
서프러제트(Suffragette) 운동으로 영국에서 국민투표법이 제정됐을 때, 민심은 여전히 차가웠습니다. 그러나 법 집행 이후 의식은 빠르게 변화해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보통선거의 원칙은 성별에 제한을 두지 아니할 것을 말합니다. 먼 훗날 여대가 소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동덕여대 시위와 여성혐오 범죄 판결에 이견이 없는, 그 사회가 도래하기 위해 우리가 여기서 전초전을 벌였다고 기록하겠습니다. 존재는 개방할지언정 소멸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