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탑] 위기 속 인문학에 대한 성찰과 가치 탐구
집에서 학교까지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 나는 혼자 지하철 타는 시간이 지루해 때론 온갖 공상을 하며, 때론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들 죽은 눈으로 멍하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어느 날, 나는 흔치 않은 광경 을 목격했다. 스마트폰에 몰두한 사람들 사이, 한 어르신이 책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바빠서 도통 책 읽을 시간이 나지 않는다’는 핑계를 댔던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된 순간이었다. 언젠가부터, 책을 읽는 건 꽤나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라고 느껴진다.
인문학이 위기라고들 말한다. 인문학이 위기에 처했다는 진단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새삼스럽다고 되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언제는 위기에 처하지 않은 적이 있느냐 반문하면서 말이다. 이는 그 위기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닌 장기적인 것임을 지적하는 말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인문학의 위기는 가볍게 여길 문제가 아니다. 힌국연구재단에 따르면 2023년 정부 R&D 예산 30조6574억 원 중 인문, 사회 분야에 편성된 비용은 약 1.2%에 해당하는 3000억 원을 웃돌았다. 이중에는 시장탄력성이 높은 사회과학 분야도 포함돼 있다. 이를 제외한 순수 인문학 지원분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연구 지원 예산의 약 10%를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에 지원하고 있는 것과 매우 대비된다.
올해 초 R&D 예산 삭감에 과학기술계는 연구현장을 파괴하는 행위라며 크게 반발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이미 인문계에 대한 지원은 부족하다 못해, 대학교에선 인문계열 학과를 폐과하는 등의 구조조정이 일어나고 있었다. 과학기술은 객관적이라는 인식,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인식에 국민들은 과학기술에 대체로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따라서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 예산은 꾸준히 늘어났고 올해 정부가 발표한 예산 삭감에 큰 반발을 가지고 왔다. 반면 인문학 연구에 대한 지원은 부족하고, 상대적인 관심도가 떨어진다.
그럼에도 인문학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있었다. 소설가 한강이 한국인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고,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감동과 기쁨을 선사했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이후 서점 매출이 40% 올랐다는 보도가 있었다. 비록 수상의 여파로 인해 그저 반짝하는 바람일 수 있고, 이것이 그동안 문과생들이 받아온 설움을 달래줄 만한 인문학의 전성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인문학은 책 몇 권 읽는다고 습득되는 학문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세대에서 시작된 독서 열풍은 주목할 만하며, 이는 더욱 뜨거워질 것이 분명하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디지털,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하고,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이 설 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는 위협감에 경종을 울리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한강 작가가 인문학이 가져오는 힘의 위대함을 보여줬다.
인문학의 존립을 위협하는 현재의 열악한 환경은 개선돼야 한다.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정부의 재정적 지원이 증대돼야 한다. 특히 대학에서의 인문학 교육은 더욱 중요하다. 인문학은 현재 대학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있으며, 인문학 관련 전공자들은 취업의 기회가 극히 제한되고 있다. 환경공학과에 재학 중인 나는 환경을 공부하며, 인문학적 설계의 중요성을 더욱 깨닫게 됐다. 결국 이 세상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 공학적 설계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배경을 기반으로 한 미적, 인문학적 소양을 키우는 것 또한 필수적이다.
흔히들 인문학을 ‘공부하면 좋지만 실생활에는 크게 도움되지 않는 학문’ 또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 공부하는 학문’으로 여긴다. 대학에서도 인문학 관련 전공의 인기가 나날이 줄어들고 있고, 때론 인문학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인문학이 앞으로 더 중요해질 사회에 살고 있다.
2011년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해 말해 인문학의 열풍을 잠깐 불러왔던 적이 있다. “기술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인문학과 결합한 기술이다”라는 그의 연설은, 인문학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스티브 잡스가 말한 인문학이란, 인간적인 무언가를 통해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기술에 도달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공지능과 창작물을 만드는 것조차 로봇의 일이 될 것이라는 현 상황에 대한 우려가 있지만, 사람의 생각과 감정은 그 어떤 기계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가치와 깊이를 지닌다.
기술 발전이 가속화되는 시대 속에서 인문학의 진정한 가치는 과연 무엇일지, 그 기술 속에서 인간다움을 지킬 방법은 무엇일지 고민해봐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