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진 105인의 여성 미술가를 조명하다, 윤난지 명예교수

2024-11-10     정재윤 기자

편집자주대한민국을 기쁘게 한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한 아시아 11개국 여성 미술가들을 조명하는 ‘접속하는 몸: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전혀 관련없어 보이는 이 두 사건의 공통점은 과거 ‘여류’로 취급됐던 여성 작가들을 시대가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대학보는 여성 미술 작가의 존재를 조명한 ‘그들도 있었다’와 여성 문인 작가를 집대성한 ‘한국 여성문학 선집’으로 여성 예술의 역사를 살펴본다.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는 윤난지 명예교수의 모습. 윤 교수는 여성 미술사를 “다양성의 미학”이라고 표현하며, “그렇기에 (여성 미술사를) 더욱 조명해내야 한다”고 말했다. 강연수 사진기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알려진 여성 예술가들은 희박해요. 남성 중심 미술사에서 여성들은 미술사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역사를 함께 만든 절반을 도외시하고 있었던 거죠.”

조명받지 못한 근현대 여성 미술가 105명을 망라한 서적 ‘그들도 있었다: 한국 근현대 미술을 만든 여성들’은 윤난지 명예교수(미술사학과)와 그의 제자들로 구성된 여성 연구자 모임인 현대미술포럼(포럼)의 저서다. 작가에 대한 설명과 메모가 빼곡히 적힌 책에서 미술사를 향한 그의 열정을 엿볼 수 있었다.

 

가려진 여성 미술사를 조명하다

윤 교수는 그물망처럼 엮인 사회와 역사를 탐구하며 현대 미술사를 연구해 왔다. 우리대학 사회학 학사와 석사, 미술사학 석박사를 거치며 미술사를 ‘사회사 속 미술사’로 연구하는 방법을 체득한 것이다. 미술사는 미술가의 삶이 담긴 역사이기도 하기에 당시의 사회문화적 상황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는 미술사에서 여성이 가려진 이유를 여성을 주목하지 않은 기존 미술사 연구에서 찾았다. 근현대에 들어서면서 여성의 사회진출은 늘어났지만, 여전히 여성은 미술사에서 창작 주체로 존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세기 한국 현대 미술사에서는 여성의 비가시화 문제가 더욱 심각했어요. 여성 미술가들은 서양과 비교해 봐도 현저히 적었고, 나혜석과 같이 알려진 여성 미술가도 작품 자체가 아닌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알려지게 된 경우가 많았죠.”

근현대 여성 미술사를 조명할 필요성을 느낀 윤 교수와 포럼은 2019년부터 여성 미술가들을 조사하고 목록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포럼은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은 영문 미술사학 서적을 읽는 모임에서 시작했다. 1992년부터 지금까지 지속해 온 포럼은 포스트모더니즘, 여성주의 서적을 읽고 분석할 뿐만 아니라, 책을 함께 집필하기도 했다.

‘그들도 있었다’는 2020년 ‘김달진미술연구소’ 홈페이지(daljin.com)에 현대미술포럼의 이름으로 한 달에 두 번씩 연재되던 칼럼에서 출발했다. 작가의 여성주의 의식 유무와 관계없이 작품성에 근거한 작가 선정이 이뤄졌고, 한 달에 두 번씩 작가 3~4인의 작품론을 게재했다. 윤 교수는 미술사 연구 과정에서 여성 작가를 목록화하기도 했지만, 집필을 위한 조사 과정에서 새로 발견하게 된 작가 또한 적지 않았다. 그렇게 모인 여성 미술가의 수는 105명이다. 이는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선집’에 수록된 남성 미술가 수와 비슷하다.

윤난지 명예교수가 인터뷰를 위해 준비한 답변지의 흔적. 종이를 빼곡히 채운 필기의 흔적이 그의 열정을 보여준다. 강연수 사진기자

 

미술사가 더 다양해질 수 있을 때까지

많은 사회 구성원은 ‘훌륭한 예술가’라는 말에 여성을 떠올리지 않는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그린 원시인도 우리는 남성을 상상하죠. 사실 사냥을 나가지 않은 여성이 그렸을 확률이 높은데도 말이죠. 그게 미술사의 편견인 거예요.” 여성 미술가들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가려질 수밖에 없었고,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에 드러난 여성적 소재 또한 세상에 드러나지 못했다. 윤 교수는 여성의 예술적 소양이 열등해서 수록되지 못한 것이 아니며, 여성과 여성적인 것 또한 예술의 일부이고 그렇기에 의식적으로 편입돼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여성 미술가들은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에 조사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담당 연구원에게) 선집 작성 과정에서 작가나 작가의 가족을 꼭 만날 것을 당부했는데, 세상을 떠나신 분들은 자료 확보가 정말 힘들었어요. 이 책을 계기로 여성 미술에 대한 자료를 많이 수집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도 후속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죠.” 한 무명작가가 자신이 선집에 실렸다는 소식을 듣고 보낸 고맙다는 연락은 쉽지 않던 집필 과정에서 보람이 됐다.

윤 교수는 여성 미술사를 “다양성의 미학”이라고 표현한다. 공론장에서 활발히 공유되는 남성 미술은 한 시기마다 하나의 경향으로 수렴한다. 반면, 여성의 경우 같은 시기이더라도 보다 다양한 ‘여성만의 경험’이 담겨 있다. 그는 미술사에서 성별을 이유로 의미 있는 작품이 가려지지 않기를 꿈꾼다. 그렇기에 가려진 여성 미술사를 조명하는 과정은 과거 미술가들이 그려낸 미술사에도, 현재 미술가들이 그려낼 세계에서도 중요한 절차인 것이다. 윤 교수는 “앞으로도 근현대 미술사에 큰 영향을 끼친 미술가들을 선별해 조명하는 과정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