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여성미술의 반쪽을 찾는 과정, ‘그들도 있었다’
편집자주 |대한민국을 기쁘게 한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한 아시아 11개국 여성 미술가들을 조명하는 ‘접속하는 몸: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전혀 관련없어 보이는 이 두 사건의 공통점은 과거 ‘여류’로 취급됐던 여성 작가들을 시대가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대학보는 여성 미술 작가의 존재를 조명한 ‘그들도 있었다’와 여성 문인 작가를 집대성한 ‘한국 여성문학 선집’으로 여성 예술의 역사를 살펴본다.
4인.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 100인 선집’에 수록된 여성 작가 수다. 이후 확장 발행된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 120인 선집’에 수록된 여성 작가도 5인에 그쳤다. 남성 중심으로 기록된 역사에서 예술사 역시 예외는 아니다. 책 ‘그들도 있었다’는 윤난지 명예교수(미술사학과)와 그의 제자들로 구성된 현대미술포럼이 함께 집필한 105인 여성 미술가들의 대서사시다.
여성의 경험을 섬세하게 직조하다
책에 소개된 근현대 여성 미술가 105인 중 우리대학 출신 작가는 22인이다. 이들은 ‘여류 화가’라는 꼬리표에도 본인만의 미술 세계를 구축해 나갔으며, 여성들만의 협회나 전시를 만들어 여류라는 편견에 정면으로 맞서기도 했다.
우리대학 서양화과 첫 졸업생인 신금례(교육대학원 석사⋅72년졸) 작가가 그 예다. 한국여류화가협회 회장을 맡은 신 작가는 결혼과 육아로 가정에만 머물다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하고자 모인 다른 작가들과 ‘여류화가 14인전’을 개최했다. 김수자(서양화 전공 대학원 석사⋅81년졸), 홍순주(동양화 전공 대학원 석사⋅80년졸) 작가는 20세기 가정 내 여성들의 소일거리로 여겨졌던 바느질, 조각보를 활용한 작품을 만들었다. 김 작가는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제작한 ‘일기’ 연작에서 바느질이라는 행위로 기하학적 형태를 만들기도, 의복을 활용한 입체적인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결혼과 출산으로 작품에 집중할 시간이 적었던 홍 작가는 짧은 호흡으로도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조각보를 소재로 삼았다. 그는 무수히 겹친 가로선과 세로선을 활용해 조각보의 결을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이러한 작품 표현은 기존의 정형적 미술 표현과는 분명히 구분되기도 한다. “여성성의 힘과 발현은 발견되는 것이기보다 내재돼 있다”고 표현하는 원문자 명예교수(동양화과)의 ‘무제’는 자연스러운 종이 질감과 선을 사용해 그리드와 평면성으로 대표되는 남성적 권위에서 벗어난다. ‘그들도 있었다’를 집필한 김현숙 연구원은 그의 작품을 이렇게 표현한다.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오가며 여성적 추상의 가능성을 펼친 원문자 작가의 작품에서 추상화의 젠더적 구획은 효력을 잃고 마는 것이다.” 원 교수의 작품은 기존 추상화의 남성적, 권위적 형식을 벗어난다. 박일순 명예교수(조소과) 또한 보편적 인간의 몸으로 여겨지던 남성 육체에서 벗어나, 여성의 몸을 조각으로 표현한 ‘Desire’을 선보였다. 이 또한 남성 중심 사회에서 규정된 정상성을 탈피한 작품이다.
미술의 언어로 표현한 사회적 목소리
보다 직관적이고 사회적인 방식으로 페미니즘을 전개한 미술가들도 있다. 김인순(생활미술⋅62년졸) 작가는 여성 노동자와 같은 젠더화된 하위주체를 교차성의 관점에서 재현했다. 그림 ‘그린힐 화재에서 스물 두 명의 딸들이 죽다’에는 밤낮없이 고된 노동을 계속하지만, 주거와 노동권조차 보장받지 못했던 여성들의 아우성과 목소리를 담았다. 정정엽(서양화⋅85년졸) 작가는 아이를 등에 업고 구인 공고판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여성의 모습으로 변화하지 않는 사회에 물음을 던진다. 윤 교수는 “이들 작가는 정치적, 사실적인 형태를 통해 여성의 현실을 고발하는 작품들을 창작했다”고 말한다.
추상화 ‘여성 되기’를 선보인 윤효준(서양화 전공 대학원 석사⋅84년졸) 작가는 한국 최초 여성 판화가 단체인 ‘서울프린트클럽’을 결성해 여성 미술가만의 전시로 미술계 내 여성의 위치를 독자적으로 만들어냈다. 윤 작가는 작품에서도 자연과 여성 사이 관계를 탐구해 남성과 서구 문명으로 구성된 기존 추상 문법에 도전한다. ‘합(合)의 기원’에서 그는 추상적 상징을 식물에서 동물, 인간, 풍경까지 확장한다.
작품에 개인적 경험을 녹여내는 것을 시작으로 사회에 여성 당사자의 목소리를 직접 전하기까지, 작가들은 개인과 사회의 경계를 넘나들며 과감한 미술적 언어로 자신을 드러낸다.
미래의 여성 미술가 위한 디딤돌이 될 근현대 여성미술사 기록
윤 교수는 “과거를 보는 시각은 아직도 과거에 머물러 있다”며 “지금까지 여성 예술은 너무나도 폄하돼 왔다”고 말한다. ‘그들도 있었다’는 제목 또한 지금까지 가려졌던 여성의 창작 활동을 가시화한다는 함의를 둔다. 필진으로 참여한 권화영(미술사학 전공 박사과정)씨는 “알려지지 않은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을 집필하는 과정은 곧 한국 현대미술사가 이들을 배제해 온 역사를 증명하는 것임을 머리가 아닌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강은주 교수(미술사학과)는 “제도적 불평등으로 가려진 과거 여성 미술가들에 대한 연구가 계속돼 여성주의에 대한 자유로운 발언의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술계에서 활동하는 여성 미술가, 여성 전시기획자, 여성 평론가의 수가 확연히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상층의 문화정책 책임자와 교육자들의 경우 아직도 남성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남성 미술로만 대표됐던 근현대 미술사를 조명하는 시도는 균형 잡힌 미술사를 위한 과정이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을 마련하는 미래지향적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