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야 산다] 슬프고도 황홀한 활자의 세계
고려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응급의학과 전문의를 취득, 2017년부터 이대목동병원에서 재직 중이다. 작가로도 활동하며 『만약은 없다』, 『지독한 하루』, 『차라리 재미라도 없든가-읽어본다』를 썼고, 의사와 환자의 만남을 담은 『그는 가고 나는 남아서』 외 다수의 책을 함께 썼다.
중학교 2학년 때 중2병이 찾아왔다. 적당한 시기에 올 것이 왔다. 방구석 중학생은 자아의 눈을 번쩍 떴다. “이 세상의 주인공은 바로 나야!” 마침 H.O.T 형들의 노래 가사 때문에 병색이 깊어졌다. “이제는 모든 세상의 틀을 바꿔버릴거야. 내가 이제 주인이 된 거야.” 헤드셋으로 나라에서 허용된 유일한 마약인 음악을 재생하면 세상은 내가 중심인 뮤직비디오였다. 마치 일본소년만화 주인공처럼 팔이 늘어나서 나쁜 놈을 때려주거나 우연히 집어든 나무 막대로 검기를 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소년만화는 많은 소년이 비슷한 병색을 겪기 때문에 존재할 것이다.
중2병에 시름시름 앓던 나는 세상의 주인공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남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그 또한 끔찍한 일종의 병태생리였다. 그러다가 교과서에서 처음으로 문학을 접했다.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이 처음으로 접하는 윤동주 시였다. 그런데, 큰 충격을 받았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세상에,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이라니. 비슷한 감정을 찾기 위해 시선집을 뒤져보다가 자작시를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SNS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라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표절 시비가 붙었다면 백전백패였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읽었던 시구를 어처구니 없이 비슷하게 적었던 그 노트는 격동하는 호르몬이 만들어낸 흑역사였다. 평범하지만 눈뜨고 봐주기 어려운 중학생이었다.
다만 이 시절을 통과하면서 글쓰기가 환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각인했다. 글을 쓰면 다른 사람이 즉시 읽을 수 있었다. 다른 도구나 특별한 기술이 필요치 않았다. 펜과 노트만 있다면 혼자서 글을 마음대로 창작할 수 있었다. 멋진 글을 읽고 직접 글을 써서 누군가에게 읽히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하자 본격적으로 현대시와 소설을 찾아 읽었다. 입시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의 글만 지긋지긋하게 나왔다. 도대체 산 사람들은 어떤 글을 쓰는지가 궁금했다.
대학 내내 교과서 대신 문학을 들고 다녔다. 과시용 독서이기도 했지만, 가끔 정말 문학은 멋졌다. 길을 걷거나 지하철을 기다리다가도 짬을 내서 책을 읽었다. 외출할 때 책이 들려있지 않으면 불안했다. 시집은 휴대하기 편했고 화제를 삼기에도 좋았다. 그러다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을 만나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중략)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이때 어떤 문장을 읽으면 그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제부터 세상은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곳이었다. 한동안 ‘혼자 가는 먼 집’을 암송하다가 갑작스럽게 자리에 멈춰 서서 울었다. 슬프고도 황홀했다. 이런 시구와 또다시 조우하고 싶어 ‘문학과 지성사’ 시인선을 순서대로 빌려 읽었다. 내가 찾은 멋진 문장은 이미 널리 알려진 위대한 문장이었다. 문학의 정수가 담긴 문장에는 만인이 숙연해지는 법이었고, 이름을 남긴 시인에게는 까닭이 있었다.
나는 끝없이 다양한 활자의 층위를 갈구했고, 그 과정에서 매번 다른 세계를 만났다. 이제 누구나 인용하는 고전이 있지만 아직 그 세계를 직접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누군가 ‘있어 보이는’ 책을 언급하면 몰래 주문해서 읽었다. 지적 허영심이었지만, 매번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역사 속 천재들은 궁극적으로 지식과 감정을 담은 활자만을 남겼다. 그들은 다른 우주에서 온 것처럼 지적이었고 특유의 위트를 뿜어냈다. 활자 속 세상은 곧 세상 그 자체였다.
닥치는 대로 읽다가 인생 작가를 만났다. 한국어로 직접 기록되었다고 믿을 수 없는 한강의 작품들이었다. 주인공은 묘하게 작가와 동일시되면서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파멸했다. 인물들은 상실을 겪고 미쳐가면서 어두운 이미지의 꿈과 교차되었다. 그가 종이 위에 창조한 세상이 지나치게 고독해서 두려울 정도였다. 문학에 자신을 욱여놓고 파괴하듯이 써내야만 완성할 수 있는, 악독하고도 황홀한 슬픔의 세상이었다. 누가 기록하느냐에 따라서 활자는 타인의 마음을 뿌리부터 변화시키고 물들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문학은 미치도록 위대했다.
글로 전해지는 감정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믿게 되었다. 위대한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서는 전혀 부끄럽지 않은 순수한 눈물이 흘렀다. 그 정화의 세계를 갈구했고, 그 안에서 살고 싶었다. 나는 응급실에서 일하면서 타인의 불행을 보았다. 그들을 삶으로 이끌며 돌보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일이었다. 다만 그 불행들이 전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나는 내가 사랑하던 활자를 바탕으로 보고 겪은 일을 썼다. 그 글들로 나는 세상 밖으로 나와, 활자에 투신해서 살고 있다. 활자는 내가 생에서 의미를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나는 오늘도 고개를 숙이고 느리게 나아가는 황홀한 활자의 세계를 유영한다.
남궁인 이대목동병원 응급의학과 임상교수·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