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탑] 권리를 위한 투쟁
고등학생 때 대학 좀 잘 가보겠다고 독서토론 모임에 참여했다. 생활기록부에 기재해 준다는 정치와 법 선생님의 주도로 만들어진 모임이었다. 선생님이 가져오신 많은 책 중 ‘권리를 위한 투쟁’을 읽었다. 18살 고등학생에게 19세기 독일의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이 쓴 그 책은 어렵기만 했다. 기억에 남는 문장은 단 한 문장. “권리를 완전히 포기하는 일은 도덕적 자살에 해당한다.”
예링은 도덕의 조건 중 하나인 권리를 박탈당한다면 동물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에게는 육체적인 생명뿐 아니라 도덕적인 생존도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타의에 의해 권리를 침해당하는 것은 생명을 박탈당하는 것이며, 여기에 저항하지 않고 포기하는 사람은 자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즉 인간에게 권리를 위한 투쟁은 권리자 자신에 대한 의무다.
우리에게도 곧 권리를 행사할 시간이 다가온다. 내 손으로 총장 후보자를 ‘선출’할 수 있는 권리다. 2016년 최경희 제15대 전 총장이 사퇴하며 이화에는 직선제의 바람이 불었다. 기존 간선제에서는 소수의 교원, 직원, 동창, 법인추천위원이 총장 후보자를 법인 이사회에 ‘추천’해 왔다. 학교 운영의 문제점이 드러나며 간선제로 리더를 뽑는 방식은 구성원들의 의견을 잘 반영하지 못한다는 한계에 봉착했다. 그렇게 도입된 것이 총장 직선제였다. 이화의 모든 구성원이 치열하게 논의하며 내린 결과였다. 구성원들의 눈과 귀로 ‘어떤 후보자가 삶의 터전인 학교를 발전적으로 이끌 수 있을지’를 더욱 날카로이 관찰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현재 투표권을 가진 구성원 단위는 교수, 직원, 학생, 동창이다. 단위마다 투표 반영 비율도 다르다. ▲교수 77.5% ▲교직원 12% ▲학생 8.5% ▲동창 2%로, 인원수까지 고려해 계산했을 때 교수 1명의 표는 학생 1명의 표에 비해 약 200배의 힘을 갖는다. 그러나 학생의 투표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첫 직선제로 선출된 김혜숙 제16대 전 총장은 결선투표에서 학생 유권자 중 약 95%의 지지를 받아 당선됐다. 결선투표의 환산된 유효표는 모든 단위를 합쳐 약 957표였다. 결선투표에서 환산된 학생의 유효표는 47.306355표. 그중 45.113704개의 표가 김혜숙 전 총장에게 향한 것이다. 그날 이화인들이 행사한 45.113704표는 결코 작지 않았다.
그러나 제16대 총장선거에서 학생 투표율은 1차와 결선투표 모두 50%를 넘지 못했다. 각 단위별 1차 투표율은 ▲교수 86% ▲직원 88.5% ▲학생 41.9% ▲동창 77%였다. 코로나19 탓에 온라인으로 진행된 제17대 선거에서도 학생 단위의 1차 투표율이 22%로 가장 낮았다. 교수는 90%, 직원은 88.4%, 동창은 80%가 투표했다. 원인은 사전에 정보제공동의(정제동)를 한 사람만 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으나, 학생들의 정제동 참여율은 26.8%에 그쳤기 때문이다. 제16대와 제17대 모두 학생들의 투표율이 타 단위에 비해 한참 떨어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학생의 투표 반영 비율이 낮아 선거에 관심을 두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처럼 맴돌 수밖에 없는 논제가 된다.
시위와 치열한 고민으로 얻어낸 권리는 포기되고 있다. 이 상황을 예링의 논리에서 생각하자면, 총장 후보자 투표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이화 구성원의 의무를 지지 않은 것이며, 그 정체성을 상실한 것이다. 저마다 권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일정과 시간에 쫓겨 기권했을 수도 있고, 총장선거가 실시되는지조차 몰랐을 수도 있다. 이는 총장선거가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벌어진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툭 까놓고 말하자면 본격적인 총장선거 기사를 준비하기 전까지 선거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러나 기사 발제를 준비할수록, 직선제의 역사를 돌아볼수록 총장 직선제가 이화에 얼마나 큰 의미인지를 되새기게 됐다.
하반기 이대학보에서 발행할 총장선거 기사가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그런 울림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총장선거 TF장을 맡았다. 투표 반영 비율을 두고 설왕설래하는 이야기는 이대학보 1691호(2024년 9월30일자)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번 호에서는 독자들에게 후보자가 걸어온 길을 소개하는 약력 기사, 이화의 구성원들이 바라는 차기 총장, 김은미 총장의 공약 점검기사를 다룬다. 차기 총장에게 바라는 점과 김은미 총장이 지킨 약속을 함께 읽으며 독자가 다음 후보자에게 줄 숙제를 생각할 수 있도록 기획했다. 18일(월)에 발간될 1695호에서는 이화미디어센터 소속의 세 언론기관 EUBS, 이화보이스, 이대학보가 함께 총장 후보자 인터뷰를 진행할 예정이다. 총장 직선제의 과열을 막기 위해 선거 운동이 다소 제약된 현 상황에서, 이대학보는 독자들에게 권력의 제4부로서의 시각을 전하고자 한다. 이대학보가 독자들에게 총장선거가 자기 일이라고 느끼게 하는 충실한 채널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