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는 흐르네] 한국의 숨결을 잊지 않고 세계로 나아간 작곡가 나효신

2024-09-29     안정연 기자

편집자주|넓은 바다도 한 방울의 물에서 시작된다. 물은 자유자재로 형태를 바꾸며 세상을 여행하고, 가는 곳마다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합창곡 ‘우리는 흐르네’(2024)를 작곡한 이원지(건반·08년졸)씨는 해외에 사는 동문들을 물에 비유했다. 이대학보도 ‘이화는 흐르네’ 코너에서 해외로 떠난 동문들의 발자취를 좇는다. 이번 호에서는 두 번의 대한민국작곡상 수상자이자 The ASCAP Plus Award 연례 수상자, ‘가야금 명인 황병기와의 대화’의 저자인 나효신(작곡·82년졸)씨의 이야기를 담았다.

 

저는 음악, 문학, 자연, 일상, 예술 작품 등 많은 것으로부터

영감을 받습니다.

나효신씨는 자신이 작곡하는 과정을 “자신만의 고유한 텃밭을 가꾸는 과정”이라며, “이전에는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소리를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겠다”라고 말했다. 안정연 사진기자

나효신(작곡·82년졸)씨는 1988년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 정착해 수많은 해외 단체의 의뢰를 받아 현재까지 작곡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작곡가다. 서양 음악 작곡을 전공한 그는 우리 국악에도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동서양 음악을 본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해 세계로 흘려보내고 있는 나씨를 샌프란시스코의 빨간색 대문을 가진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작곡가의 삶

나씨는 1982년 우리대학 작곡과를 졸업한 뒤, 우리대학 대학원 과정 중 미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이어갔다. 처음 정착한 곳은 샌프란시스코였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콘서바토리(San Francisco Conservatory of Music)에서 한 학기를 수학한 뒤, 대도시인 뉴욕(New York)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는 맨해튼 음악대학(Manhattan School of Music)에서 1985년에 작곡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이후 콜로라도 대학교(University of Colorado at Boulder)에서 1988년 작곡 및 음악이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학업을 마친 나씨는 처음 정착했던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갔다. 그는 “동양인이 많이 사는 도시인 샌프란시스코는 서양이지만 동양보다 더 동양적인 면이 있는 도시”라며 “여기에서 작곡가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정착했다”고 말했다. 인종, 출신 국가, 문화가 다양한 샌프란시스코를 두 번째 고향으로 선택한 것이다.

작곡가 나효신씨는 우든피쉬 앙상블(Wooden Fish Ensemble)을 창단해 동서양을 어우르는 작품을 작곡하고 발표해오고 있다. 조은지 기자

나씨는 2003년 동양의 전통음악과 동서양 악기를 위한 현대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 단체, 우든피쉬 앙상블(Wooden Fish Ensemble)을 창단했다. 그는 이 단체를 위해 ‘여러 개의 파라다이스’(Many Paradises, 2023년 작곡)와 ‘한국에서 미국으로 - 120년 그리고 그 이후’(From Korea to America - 120 years and Beyond, 2022년 작곡) 등 많은 작품을 작곡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 120년 그리고 그 이후’는 클라리넷,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가야금 그리고 피아노를 위한 작품으로 그는 이 곡에 대해 “미국에서 교류해 온 한국계 미국인 친구들을 인터뷰한 것에 기인해 작곡했다”고 말했다. 특히 이 작품은 한국인의 미국 이민 역사 120주년을 기념하는 우든피쉬 앙상블 21회 정기공연에서 초연되기도 했다. 우든피쉬 앙상블과의 지속적 활동을 통해 동양, 특히 한국의 전통음악을 알리고 있는 나씨는 샌프란시스코의 음악적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영감의 원천과 새로운 소리를 찾는 여정은

작곡가들이 작품을 쓰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작곡가에 따라 영감을 정의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나씨는 영감을 작품이 시작되는 “작품의 근원지”로 정의 내렸다. 그는 “(영감을 얻는)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특히 문학작품을 읽으며 이전에는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소리를 상상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2019년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많고 많은 소리들’(Great Noise)를 읽은 뒤, 같은 제목의 피아노 독주곡을 작곡했다.

다양한 방식으로 영감을 얻어 동서양을 아우르는 나씨의 작품은 대중과 전문가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나씨는 1994년 양악 부문에서 ‘피아노 변주곡’으로 ◆대한민국작곡상을 수상했으며, 2003년에는 국악 부문에서 관현악곡 ‘불완전성에 관하여’로 같은 상을 수상했다. 나씨는 미국에서 유학하며 “(서양 음악에 대해) 이화에서 매우 잘 배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 미국에 유학 왔을 때는 이화에서 ‘서양 음악’을 잘 배워서 미국 학교에서도 불편함이 없다고만 생각했어요.” 나씨는 한국인으로서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부하거나 생활하는 데에서 문화 충격이 없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나효신씨는 ‘황병기와의 대화’의 저자이기도 하다. 왼쪽에는 한글, 오른쪽에는 영어로 쓰인 이 책은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의 깊은 예술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안정연 사진기자

그는 한국인으로서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을 더 많이 배워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한국 전통음악에 대한 공부도 시작했다. 가야금, 해금, 거문고, 아쟁, 피리, 장구 등 다양한 국악기와 판소리도 조금씩 배워 나갔다. 나씨는 “작곡가는 교과서를 통해서만 배우는 대신, 악기 줄을 떨었을 때 어떤 진동이 오는지 신체로 느껴보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렇게 체득한 국악 지식이 단단한 뿌리가 돼 국악에 있어서도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동서양에서 모두 인정받는 그에게도 음악적 고민은 있었다. “한국적이어서 좋다”는 많은 평들은 그에게 고민을 안겼다. 나씨는 그의 곡이 ‘한국’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도록 다른 동양 국가들의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중국 악기 ◆구친과 일본 악기 ◆고토, ◆샤미센이었다. 그 결과, 한국적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시야가 넓어지고 음악 세계가 깊어졌다. 배워온 서양 음악이 자신을 떠난 것도 아니었다. 들판에 나가면 다양한 식물, 동물이 공존하는 것처럼 자신의 음악도 단지 넓은 것임을 깨달았다. 한국 음악과 서양 음악, 그리고 다른 동양 음악을 품은 나씨만의 음악은 곧 그에게 고유한 텃밭이 됐다. “저는 저의 고유한 텃밭을 가꾸는 거예요.”

나효신씨의 책상에 있던 중국의 현악기 ‘구친’의 모습. 그는 다양한 악기를 배우며 습득한 지식을 자신의 작품에 다채롭게 녹였다. 안정연 사진기자

 

이화에서 배운 가르침과 선배를 바라보며

나씨는 1998년부터 26년째 애스캡(ASCAP·American Society of Composers, Authors and Publishers)에서 The ASCAP Plus Award를 받고 있다. 애스캡은 작곡가, 작가, 음악 출판자로 구성된 미국의 저작권 멤버십 협회다. 애스캡이 수여하는 The ASCAP Plus Award는 1년간 위촉받은 작품 수, 초연한 작품 수, 연주한 기존 작품 수, 작품 출판 여부, 음반 발매 여부 등을 기준으로 활동량이 많은 작곡가에게 수여된다. 나씨는 이 상을 매년 수상하며 음악계에 꾸준하고 활발한 활동을 인정받고 있다.

그는 이러한 지속적인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이화에서의 든든한 가르침과 출신 동창들의 영향을 꼽았다. 대한민국 작곡가 1호인 우리대학 작곡과 출신 작곡가 故김순애(작곡·41년졸)씨를 언급하기도 했다. “이화에서 작품을 쓰는 방법, 음악이론, 음악사 등을 배운 것도 큰 부분이었지만, 김순애 선생님의 존재 자체와 우리대학의 이영자 선생님, 홍성희 선생님께서 계속 작품을 쓰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어요.” 더불어 나씨는 캐나다에서 동창을 만났던 일화를 이야기했다. 신문에 작게 난 나씨의 연주회 소식을 보고 연주회 리허설 날 연주자 모두를 먹이고도 남을 수의 도시락을 싸 온 선배 동창의 일화였다. “제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도 모르시고, 리허설 시간에 도시락을 싸가지고 오신 거예요.” 선배는 나씨와 일면식도 없었지만 같은 대학을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선뜻 온정을 건넨 것이다.

나효신씨는 10월16일 우리대학 음악대학 리싸이틀홀에서 자신이 작곡한 6개의 피아노 작품을 발표할 예정이다. 우리대학 재학생이면 누구나 무료로 입장이 가능하다. 안정연 사진기자

10월16일 우리대학 음악대학 리사이틀홀은 나씨가 작곡한 피아노곡의 선율로 가득 찰 예정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며 작곡한 여섯 개의 작품이 연주되며, 나씨가 직접 해설을 진행한다. 나씨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하며 진정한 공존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음악가로 평생을 살아온 그는 “동료들과 각자 자신 그대로를 지키며, 서로에게 양보하지도 강요하지도 않는, 모방할 필요도 없는, 그런 평화로운 공존을 실천해 오고 있다”고 말했다. 

“편안하게 자기를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은 중요한 이야기예요.”

나효신씨가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자택에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음악가로 평생을 살아온 그는 "동료들과 각자 자신 그대로를 지키며 평화로운 공존을 실천해 오고 있다"고 말했다. 안정연 사진기자

 

 ◆대한민국작곡상 : 1977년에 제정되었으며, 부문은 국악 및 양악으로 구분되어 있다. 우수하고 독창적인 음악작품을 발굴, 시상함으로써 음악인들의 창작의욕을 고취하고, 대한민국 창작음악을 세계적 수준으로 유도하여 국위선양을 이루는데 목적이 있다.

◆구친 : 7개의 줄과 나무로 만들어진 중국의 전통 현악기.

◆고토 : 일본 전통 현악기로 우리나라의 가야금과 유사하다.

◆샤미센 : 일본 전통 현악기로 주로 현을 퉁겨서 연주하는 발현악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