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성소수자가 살아갈 국가는 어디에

2024-09-29     박연정 기자

국가는 성소수자들을 외면하지만 성소수자에게는 서로가 있다. 벼랑 끝에 선 서로를 치유하는 여러 성소수자 단체가 존재한다. 성소수자 지원은 물론, 실태 파악까지 전무한 상황에서도 단체에 소속된 성소수자와 ◆앨라이들은 각자만의 울타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든든한 지원자가 되는 부모들의 연대

2017년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서울광장을 행진하고 있는 성소수자부모모임. 제공= 성소수자부모모임

성소수자 인권을 알리고 당사자와 가족을 돕는 성소수자부모모임(부모모임)은 2014년 설립됐다. 같은 어려움을 지닌 성소수자 부모들이 모여 서로 공감하고 위안을 주는 모임인 자조모임에서 시작했다. 활동 과정에서 사회의 교육과 법이 잘못됐음을 인식한 후 지금은 비영리 인권단체로서 활동하고 있다. 부모모임은 ▲월례 정기모임 ▲성소수자 인권교육 ▲상담 ▲출판 등을 진행하며 성소수자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부모모임에서는 ‘커밍아웃 스토리’, ‘성확정 수술 가이드’와 같은 책을 출판하고,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와 협업해 영화 ‘너에게 가는 길’(2021)을 만들어 자녀의 정체성 및 지향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다. ‘너에게 가는 길’은 커밍아웃한 자식과 부모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커밍아웃은 자식이 부모를 더 넓은 세계로 초대하는 초대장이라고 생각합니다.” 14일,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부모모임 사무실에서 ‘제109회 성소수자부모모임 서울 정기모임’이 열렸다. 매달 두 번째 주 토요일에 진행되는 정기모임은 반원 형태로 모여 앉아 각자 경험과 조언을 나누는 모임이다. 3시간에 걸쳐 진행된 정기모임에서 약 30명의 참여자들은 내밀하고 솔직한 이야기를 꺼냈다. 기자가 참여한 제109회 정기모임에서는 자녀의 성 정체성에 대한 부모의 고민과 성공적인 커밍아웃 과정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대화가 진행됐다.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한 자녀를 둔 한 참여자는 앞서 자녀의 정체성을 받아들인 부모들의 경험을 들으며 점차 자녀를 받아들였다. 모임에는 성소수자 부모뿐 아니라 성소수자 당사자, 앨라이까지 참여해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시간을 가졌다.

기자가 참여한 제109회 성소수자부모모임 서울 정기모임 현장 책자. 정재윤 기자

부모모임 창립 멤버이자 활동명 지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진이 운영위원 또한 처음에는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한 아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울며 부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공부를 시작하고 모임을 진행하다 보니 자녀를 이해하지 못했던 이유가 성소수자에 대한 우리사회의 교육이 부재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조금만 지식이 있었더라도 그렇게 충격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김 운영위원은 정기모임을 계속하며, ‘자식이 힘들거나 위기 상황에 있을 때 부모는 어떤 역할이 돼야 하는가’를 항상 고민하고 배우고 있다. 

아들을 이해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연구로 이어졌다. 아들의 커밍아웃을 계기로 자료조사에 몰두한 김 운영위원은 논문 ‘가족의 거부로 인한 성소수자의 정신건강에 관한 연구: 합의적 질적 연구(CQR)’(김진이, 2017)를 직접 썼다. 그 과정에서 그는 부모가 자녀의 성정체성 및 지향성을 거부할 경우 자녀의 자살 시도율이 8배 가까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부모모임은 아직 커밍아웃하지 않은 성소수자들이 자신을 부정하며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노력한다. 성소수자 가족의 이해를 도우며 성소수자들에게 가장 가까운 ‘곁’을 만들 수 있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더 많은 가족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진 정기모임은 10년 넘게 진행 중이다.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만난 새로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마음연결 이종걸 팀장, 박재경 긴급대응 팀장(왼쪽부터). 정재윤 기자

부모에게 성소수자임을 숨기고 자신을 억눌러야 했던 사람들에게 안전한 곁을 내어주는 단체도 있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자살예방프로젝트 마음연결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성소수자 자살 문제를 다루며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마음연결은 친구사이 조사 자료에서 성소수자의 자살생각 수치가 높게 나왔다는 것에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출발했다. 2014년 친구사이에서 진행한 LGBT 욕구조사에서는 청소년 조사자의 45.7%가 자살시도를 한 적이 있고, 트랜스젠더의 경우 전체 응답자의 48.2%가 자살시도를 한 것으로 조사됐다.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동료의 자살은 가족의 죽음과도 같다.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성소수자들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털어놓는 곳으로, 가족과 같은 소속감과 연대감을 느끼는 공간이다. 마음연결 박재경 긴급대응 팀장은 “가족도, 친척도 아니지만 누구보다 가까운 존재로서 동료가 자살했을 때 커뮤니티 전체가 큰 충격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더 많은 성소수자들의 자살을 막고, 남은 사람들을 더욱 보살펴야 하는 이유다.

성소수자들은 동료의 죽음 이후에도 온전한 애도를 할 수 없다. 박재경 팀장은 “친구의 장례식에서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성소수자임을 드러내지 않고자 애쓰게 된다”고 말한다. 친구사이에서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 감염으로 죽은 동료를 기리기 위해 2014년 시작된 소규모 추모행사는 이제 매년 추석 때마다 먼저 떠나간 동료들을 충분히 애도하고 남겨진 이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재회의 밤’ 행사가 됐다.

더이상 동료를 잃지 않기 위해 마음연결에서는 ▲게시판과 전화를 통한 비대면 상담 ▲성소수자 자살예방지킴이 양성교육 ‘무지개돌봄’ 프로그램 ▲자살유족상담 ▲자살 예방 공공기관 연계 등을 진행하고 있다. 성소수자 자살예방지킴이를 양성하는 무지개돌봄 프로그램은 2019년 보건복지부 자살예방 프로그램 인증을 받기도 했다. 마음연결 이종걸 팀장은 “(친구사이 활동 때와 달리) 마음연결은 사람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어루만져야 하기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문법이 필요했다”며 “성소수자 정체성과 동시에, 한 사람의 복잡다단한 삶의 방식에 대한 고려도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마음연결의 '무지개돌봄'은 2019년 보건복지부 자살예방 프로그램 인증을 받았다. 정재윤 기자

마음연결은 더 많은 자살을 막기 위해 주변인의 감수성을 높이는 방식을 채택했다. 마음연결의 대표 프로그램인 무지개돌봄은 주변인이 성소수자의 자살 신호를 알아차리고, 사전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과정이다. 박재경 팀장은 “커뮤니티 내 자살이 심각하다면, 게이트키퍼 역할을 할 수 있는 지킴이가 곳곳에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무지개돌봄 프로그램은 성소수자 당사자뿐만 아니라 앨라이 또한 참여 가능하다. 

더 많은 성소수자가 걱정 없이 상담실로 향할 때까지

국가가 성소수자 인권 문제를 방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도담)

성소수자는 상담실로 향하는 발걸음조차 쉽지 않다. 상담사가 퀴어친화적인지 확인할 수 없다면 상담실에서조차 자신을 숨겨야 한다. 상담사의 경우, 성소수자 내담자 관련 전문 교육 과정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성소수자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함에도 시도 자체를 어려워할 수밖에 없다. 

성소수자와 함께하는 상담사모임 다다름에서는 성소수자들이 상담실에서만큼은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도록 돕는다. 다다름은 2021년부터 ‘퀴어프렌들리한 상담사 리스트’를 작성 후 배포하고 있다. 본인을 앨라이라고 선언하고 성소수자 관련 교육을 받은 상담사들에게 편안하게 상담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다다름의 리스트에는 상담사의 기본 정보뿐만 아니라 내담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 상담사의 다짐이 담겨 내담자가 편하게 상담사를 고를 수 있다. 이외에도 휠체어 접근 가능 여부, 수어 및 외국어 상담 여부 또한 추가해 더 많은 성소수자가 활용할 수 있도록 리스트를 개편 중에 있다. 25일 기준 다다름의 퀴어프렌들리한 상담사 리스트에 올라간 상담사는 95명이다.

다다름이 올해부터 시작한 자조모임 '이달의 마음'의 약속문. 제공=다다름

다다름 박도담(상담심리전공 석사·17년졸) 대표 역시 국가 차원의 데이터가 전무해 자살 예방을 위한 구체적 상담 전략을 세우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정부가 성소수자 자살 위험이 높다는 것을 인지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컨트롤 타워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금은 상담사 개개인이 알아서 찾아야 하는 상황인 거죠.”

박도담 대표는 “상담 교육에서도 근본적으로 성소수자 관련 교육 자체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대학원 상담심리 석박사 과정에도 성소수자 상담만을 전문으로 다루는 커리큘럼은 없는 상황이다. 부모모임의 김 운영위원 또한 아들이 커밍아웃할 당시 심리학 대학원을 재학 중이었음에도 성소수자에 대한 교육은 전혀 받지 못했다. 심리 상담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지만 혼자 공부하며 알아가야 했다.

사회가 변하지 않는 한, 개인은 끊임없는 좌절을 경험한다.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박도담 대표는 상담을 할 때면 조금씩 사회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담자에게 환기한다. “변화의 흐름은 걷잡을 수 없다”며 “결국에는 희망을 놓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말로 좌절한 내담자를 일으켜 세운다.

변화의 시대,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

부모모임 김 운영위원은 보수적인 군대와 종교계도 변화하고 있음을 체감했다. 그는 작년부터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군지휘관을 대상으로, 국방부에서 교관을 대상으로 성소수자 인권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천주교에서도 현재 신부와 수녀를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세상은 변화하고 있지만, 이들은 그럼에도 국가가 더욱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변화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박재경 팀장은 “국가 단위 조사가 바탕이 돼야 앞으로의 계획을 세울 수 있는데, 성소수자에 대한 조사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밑그림조차 그리기 어렵다”고 말했다. 국가 단위 조사에서 누락된 성소수자는 ‘말할 수 없는 사람’ 취급을 받으며 없는 존재가 된다. 상담사나 전문가들 또한 성소수자 인권 교육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국가 단위 조사에서 성소수자는 여전히 지워진 존재다.

 

◆앨라이: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지지하고 그들의 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비성소수자들을 지칭하는 용어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09에서 24시간 전문가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이 기사는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이 주최하고 인터넷신문윤리위원회가 주관하는 생명존중 기사공모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