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는 흐르네] 실리콘밸리 한미봉사회 강희식 명예회장, 이화에서 시작된 봉사자로서의 소명
편집자주 |드넓은 바다도 한 방울의 물에서 시작된다. 물은 자유자재로 형태를 바꾸며 세상을 여행하고, 가는 곳마다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합창곡 ‘우리는 흐르네’(2024)를 작곡한 이원지(건반·08년졸)씨는 해외에 사는 동문들을 물에 비유했다. 이대학보도 ‘이화는 흐르네’ 코너에서 해외로 떠난 동문들의 발자취를 좇는다. 이번 호에서는 삶의 절반을 봉사에 헌신한 강희식(사회사업·61년졸)씨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화여자대학교가 아니었으면
더 넓은 세상으로 눈을 뜰 수 없었을 거예요.
강희식(사회사업· 61년졸)씨는 한반도가 한국전쟁 이후 혼란스러웠던 1957년 우리대학에 입학했다. ‘남을 도와야겠다’는 소망을 품고 대전에서 갓 올라왔던 시골 소녀는 어느덧 85세의 할머니가 됐다. 강씨는 먼 땅인 미국에서 1972년부터 2012년까지 사회복지사로 일했으며, 현재는 그가 설립에 참여한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 한미봉사회’의 명예회장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뒷마당에 배나무가 뿌리 내린 강씨의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타인을 향한 애정으로 이화에
강씨는 대전 시골의 한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엄격했던 할아버지는 “계집 아이에게 무슨 대학이냐”고 말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강씨 자매를 모두 우리대학에 보냈다. 강씨의 언니는 약학과에서, 강씨는 사회사업과에서 공부했다. 아버지는 강씨가 6살이었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딸이라도 아들같이 길러달라”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시골 동네의 가난한 이웃들을 보며 자란 강씨는 마음 한구석에 안타까움을 갖고 있었다. 강씨의 할아버지는 가문의 산을 지키는 늙은 산지기를 하대했다. 강씨는 할아버지에게 “어른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돌아온 답변은 “그런 사람들과는 말도 하지 말라”였다. 이 말은 어린 강씨의 궁금증을 해소해주지 못했고, 강씨의 타인을 향한 관심과 애정은 우리대학 사회사업과에 진학하는 데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1957년, 한국전쟁 이후 혼란한 시기였지만 우리대학은 여전히 공부하고자 하는 여성들로 가득했다. 대강당은 지금과 다름없이 학생들로 꽉 차 있었고, 교수들은 채플 시간에 조는 학생들을 일일이 깨우고 다녔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를 본 강씨는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회복지사의 삶을 시작한 것은
졸업 후에는 아동과 가정을 지원하는 비정부기구인 ISS(International Social Service)에서 일하며 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해외로 입양 보냈다. 아이들을 입양 보내며 강씨에게는 “미국에 가서 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싹텄다. 때마침 미국 입양 기관에서 만나 친해진 미국인 사회복지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 절차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미주리주(Missouri) 에 있는 세인트루이스 대학(St. Louis University)에서 사회 서비스(Master of Social Service)를 공부하며 강씨의 본격적인 미국 생활이 시작됐다. 1968년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캘리포니아주(California) 산타클라라군(Santa Clara) 사회서비스 에이전시에서 1972년부터 2012년까지 무려 40년을 사회복지사로 일했다.
강씨는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으로 집 안에 쓰레기를 쌓아두고 사는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던 한 중년 남성을 떠올렸다. 돈도 많았고 조카도 있었지만, 조카는 그를 부양하고 싶지 않아 했다. 하지만 강씨는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거처를 옮기고 치료도 받자고 제안하는 강씨를 위협하기도 했지만, 경찰의 도움으로 양로원에 들어가 치료를 받으니 금세 건강해졌다. “상태가 좋아져서 만날 때마다 고맙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는데, 곧 뇌졸중이 와서 돌아가셨어요. 그때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는데, 고맙다는 얘기였겠죠.” 강씨는 ‘각각 다른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적합한 도움을 주자’는 마음가짐으로 한 사람의 끝이 조금이나마 편안할 수 있도록 힘쓴 것이다. 그 보람이 40년간의 사회복지사 생활을 가능하게 했다.
일평생 헌신했던 한미봉사회
강씨는 2012년에 은퇴하며 사회복지사로서의 삶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그의 봉사자로서의 삶은 현재 진행형이다. 1970년대 말, 그는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어려움에 처한 많은 한국인들을 만났다. 이들은 영어를 못해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사회 보장 번호도 받지 못하는 등 정착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들을 돕기 위해 강씨가 만든 단체가 ‘실리콘밸리 한미봉사회’다. 그 시작에는 이전부터 친척들의 이민을 돕고 있던 서영자(체육학과·49년졸)씨가 함께했다. 실리콘밸리 한미봉사회는 1979년부터 자리를 잡아 실리콘밸리 지역 중 하나인 산 호세시(San Jose)로부터 공식 지원받을 정도로 성장했다. 현재는 노인을 대상으로 한 점심 제공, 운동 및 영어 교실 등의 프로그램을 주로 하고 있다. 봉사자로서 실리콘밸리 한미봉사회에 온 청춘을 바친 그는 “앞으로의 삶에서 더이상 바라는 것은 없지만, 봉사회가 번듯한 건물을 갖고 지역 사회의 더 다양한 한인들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회 보장 번호: 한국의 주민등록번호와 같이 모든 미국행정기관의 행정업무 처리에 기본 번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은행 계좌 개설, 운전면허증, 아파트 임대 등에 있어서 필요하며, 신용(credit)의 적립에 있어서도 필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