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사이] 유난스럽게, 고맙습니다
출국 전 새벽까지 자취방의 짐을 빼고 잠깐 눈을 붙였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식사로는 순댓국을 먹겠다면서도 체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긴장이 무색하게 비행기는 1시간 지연됐고 기상 악화로 한동안 기체가 흔들렸다. 모처럼 창가 자리에 앉았는데, 흰색뿐이던 창밖에 마을의 모습이 드러나자 드디어 일본이구나. 며칠 전까지 난카이 대지진 주의보에 떠들썩했고, 태풍도 있을 거라지만 일단 무사히 일본에 도착했다.
입국심사를 기다리던 중, ‘재류자격인정증명서(COE)’와 ‘자격 외 활동 허가 신청서’를 본 공항 직원이 나를 다른 줄로 안내할 때부터 일본에서의 생활이 시작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단기체재 입국심사가 두세 명 지나가는 동안 장기체재의 심사가 진행됐다. 공항에 미리 발급돼 있던 재류카드에 ‘아르바이트를 해도 된다’는 허가 도장이 찍히고, 14일 이내에 주소지를 등록하라는 안내를 받은 뒤 심사가 끝났다. 일본은 비자 발급이 비교적 깐깐하대서 COE를 신청할 때부터 잘못 입력했을까 봐 걱정했으나, 이제 거주자로 인정받았으니 한 걸음은 뗀 것이다.
간사이 국제 공항에서 교토역까지는 공항 리무진 버스로 한 번에 왔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버스 기사의 안내방송 어조가 본가에서 서울로 갈 때의 버스 기사와 똑같아 순간 웃음이 났다. 교토역에 다다르고는 돌아볼 여유 없이 호텔로 직행했다. 내 몸의 절반이 넘는 40kg짜리 짐을 얼른 내려놓고 싶었다. 교토에서 만난 첫 번째 난관은 캐리어 두 개를 들고 계단을 내려가는 것. 짐과 씨름하던 중, 올라가는 방향으로 가던 청년이 큰 캐리어를 들고 내려가 주었다. 어려운 상황에 친절이 찾아와 참 다행이었다. 그 뒤로부터는 엘리베이터를 찾아 무사히 오르내렸다.
칼럼 마감 일정으로 입사보다 일주일 앞당겨 출국한 거라, 재정이 여유롭지 않아 근처 캡슐호텔에 몸만 누이기로 했다. 체크인 때 둘러보니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두 번째 난관인가 두려워하던 차에 예약한 방이 지하로 계단 몇 개만 내려가면 된다길래 안도했다. 교토에서의 첫 여정이 끝나고 마트에서 마감 할인하는 초밥을 사 먹었다. 8시간 만에 먹는 두 번째 끼니였다. 일본에 여행으로 왔을 때는 편의점에서 간식과 술을 잔뜩 샀지만, 이번에는 냉장고도, 보관할 곳도 없어 이온 음료와 물만 샀다. 그래도 아쉽지 않았다. 학교생활로 바빠지면 편의점 음식을 질리도록 먹을 테니까. 무사히 도착한 것, 딱 누울 만큼의 방이 생각보다 잠들기 편했던 것만으로 감사했다. 온갖 걱정과 불안, 해야 할 일로 시달렸던, 한국에서의 잠 못 들던 밤에 비하면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일본에서의 둘째 날 이 글을 쓰고 있다. 행(行) 간사이(関西). 한자 발음과 일본어를 섞은, 문법도 틀린 말장난 같은 제목이다. 칼럼의 코너명을 정하는 데에도 꼬박 며칠이 걸렸다. 한 학기를 함께할 머리말이니 말이다. 이왕이면 6개월간 머물 간사이 지역을 넣고 싶어 온갖 단어를 조합해 봤다. 행간(行間)을 읽는다는 말이 스쳐 지나갔다. 행간, 사이. 동어반복이지만 이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본에 방문학생으로 오겠다고 결심한 것은 여행으로 얻기 어려운 ‘생활’을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간사이행 편도 비행기를 타고부터 일어나는 일들은 내게 다가오는 현실이다. 유학생으로, 외국인으로, 거주민으로, 때로는 관광객으로 살아갈 날들 사이 나만의 행간을 찾고자 한다. 유난스럽게 의미를 기록하려 학보에 칼럼을 쓰고, 영상으로도 기록을 남기고 싶어 카메라도 샀다.
어원도 의미도 다르지만, 유(有)와 난(難)을 쓰는 다른 말도 있다.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도 한 번쯤 들어봤을 ‘아리가또(ありがとう)’의 어원이 ‘아리가타이(有難い/ありがたい)’다. 한자 그대로는 ‘어려움이 있다’. 불교에서 유래된 이 말은 인간으로 태어나고 존재하는 자체가 드물고 귀한, 고마운 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얼마 전에 이걸 알고서, 일본에서 수백 번도 넘게 말할 말의 의미를 다시 새기게 됐다. 그래, 아무 일도 없을 때(無難)보다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아리가또’를 더 많이 외치겠지.
한국에 있었을 때는 당연했던 것들. 그래서 생각이 멈추고, 강박적으로 살아가던 나날들. 모두 하나씩 정리하고 일본에 왔다. 마치 한국에서의 나는 잠시 멈춘다는 듯이. 일본에서의 삶이 익숙해지기 전에 하나라도 더 유난스럽게 고마워하자고. 어제와는 달리 가벼워진 몸으로 교토역에 갔다. 어제는 볼 겨를도 없던 교토 타워를 봤다. 그럴 수 있음에 정말 고맙다. 大きに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