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를 꽃피운 스승들②] 과학계 젠더 혁신 위해, 한국 1세대 수학자 이혜숙 명예교수
편집자주|강단 위에서 끊임없이 공부하고 가르침을 전하며, 은퇴 후에도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이화의 교수들이다. 이대학보는 이화를 떠나 삶의 제2막을 마주한 퇴임교수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화를 꽃피운 스승들’을 1680호부터 세 번에 걸쳐 연재한다. 이번 호는 성별 불균형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학교 안팎으로 학생들을 교육하고, 과학계의 젠더 편향성을 해결하고자 노력을 기울이는 이혜숙 명예교수(수학과)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 교수는 2014년 이화를 떠난 이후에도 쉼없이 여성 과학 인재 양성과 과학 연구의 젠더 혁신을 위해 힘쓰고 있다. 퇴임 직후에는 이화에서 여성 인재를 양성했듯,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젠터(WISET)에서 여성 과학 인재가 훌륭한 과학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했다. 현재는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GISTER)에서 과학 기술 연구가 성별 특성을 반영해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관심과 애정이 깃든 이화에서의 추억
이 교수는 존경하던 화학 선생님의 영향으로 화학과를 지원하고자 했지만 늦은 시간까지의 실험이 많은 화학과 대신 종이와 펜만 있으면 어디서든 공부할 수 있는 수학과로 전공을 선택했다. 그러나 1967년 우리대학 수학과에 입학했던 이 교수가 마주한 대학수학은 쉽지만은 않았다. 그는 “수학 문제가 잘 풀릴 때는 아름다운 소설을 하나 완성한 것처럼 기쁘지만, 잘 안 풀릴 때는 힘든 순간의 연속이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 교수가 느낀 수학의 매력은 과거의 고통을 다 잊게 하는 깨달음의 즐거움이었다. 그가 느끼는 수학에 대한 호기심과 재미는 공부를 지속하게 하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동기였다. 학문을 더 이어가고자 해외로 유학을 떠난 그는 교수가 돼 다시 이화로 돌아왔다. 교육하는 것에 관심 많았던 그가 자신의 연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직업이 교수였기 때문이다.
“방학에는 얼른 개강해서 아이들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교수로 지내는 동안 수업에 대한 열정과 학생에 대한 애정이 가득했다. 그가 처음 교수로 부임한 1980년대에는 민주화 운동을 하는 학생들이 수업에 들어오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학생들이 충분히 공부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던 그는 새로운 개념이 가장 많이 나오는 책을 끝까지 다 알려주겠다는 목표를 세워 수업에 임했다. 그는 학생 운동으로 학교가 문을 닫으면 집에 학생들을 초대해 수업을 열기도 했다.
그는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지식을 알려주는 것에서만 멈추지 않고, 우리대학 연구 발전에도 기여했다. 우리대학에 연구처가 신설됐을 때 그는 연구처장을 맡았다. 당시는 외환 위기 직후로 대학의 연구개발비 예산이 전체적으로 줄어드는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외부 연구비 확보에 힘쓰고 연구를 위한 건물을 증축해 우리대학의 연구 환경을 향상하는 데 기여했다. 이 교수가 연구처장으로서 끊임없이 우리대학의 연구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고민을 거듭한 덕에 당시 학생들은 좋은 환경에서 양질의 실습을 할 수 있었다.
가슴속 고이 간직한 이화의 학풍
이 교수가 이러한 교육관을 갖게 된 것은 학부생 시절 그가 이화에서 얻어간 배움 덕분이었다. 이 교수는 학부생이던 1960년대 후반의 이화를 떠올리며 “(이화의 분위기는) 당시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와는 달랐다”고 표현했다. 집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자신의 주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없던 학생들도 이화에서만큼은 ‘우린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분위기 속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여성의 가능성에 제한을 두지 않는 이화의 학풍 속에서 이 교수는 본인만의 교육관을 정립했다.
하지만 학부생 시절, 이 교수가 여자라는 이유로 겪었던 좌절의 순간도 있었다. 그가 모르는 수학 문제를 묻기 위해 강연을 온 타 대학교수에게 찾아가자 교수로부터 “여자애들은 이렇게 복잡한 문제 안 풀어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는 여성들이 남성들로부터 무시받는 말이나 좌절감을 느낄 수 있는 말을 많이 듣던 시절이었다. 그는 교수가 돼 약 10년 만에 다시 이화를 찾았고, 학생들이 여자라는 이유로 꿈을 접지 않을 수 있도록 교육하려 노력했다. 이 교수는 존재 자체로 학생들에게 귀감이 되는 선배이기도 했다. 당시 수학과에는 남녀 통틀어 해외 유학 경험이 있는 교수가 드물었다. 이 교수는 “많은 제자들이 ‘선배가 해냈으니,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학생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선배이자, 용기를 주는 교수였다.
이 교수는 자신뿐 아니라 학생들에게 역할 모델이 될 수 있는 여성 과학자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여성 과학자와 만날 기회를 마련해주기 위해서 WISE(Women Into Science & Engineering)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중고등학교 이공계 여학생에게 여성 과학자를 일대일로 맺어주는 멘토링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더 많은 여성이 과학계에 진출할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됐다.
모두를 위한 과학을 연구할 수 있도록
이화를 퇴임한 지 10년이 됐지만 올바른 과학을 해야 한다는 이 교수의 학자로서의 사명감은 이어지고 있다. 이 교수가 정의한 올바른 과학은 성별 특성이 연구개발의 전 과정에 반영돼 남녀 모두에게 이로운 과학이다. 이 교수는 “사람들은 연구 결과나 데이터를 그대로 믿는 경향이 있는데, 같은 연구라도 대상에 따라 다르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별을 고려하지 않은 연구 결과나 데이터에는 자연스레 젠더 편향성이 내재될 수 있다.
현재 그는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소장으로서 올바른 과학 콘텐츠의 중요성을 전달하고 있다. “과학 기술에 내재된 젠더 편향성을 감지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과학 기술의 형평성을 높이고 남녀 모두를 위한 연구 혁신을 이룰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과학 연구에 성별이 고려돼야 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연구자들을 위한 교육 자료를 만들며, 법과 제도 개선에 힘쓰고 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과학기술기본법에서 과학기술 연구에서 성별이라는 변수가 포함되도록 법이 개정되는 데 기여했다.
성차별적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교수였던 그는 과학계의 성별 불균형을 위해서도 여전히 앞장서고 있다. 그는 “과학자뿐 아니라 대중 전체가 (젠더 편향성 극복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그러한 연구가 늘어날 수 있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과학기술기본법 : 과학기술의 발전과 국가경쟁력 강화를 통해 국민경제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제정한 법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