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야 산다] 당신 책장의 이야기

2024-05-05     김미정 밤의서점 대표·번역가
김미정 밤의서점 대표·번역가

불어불문학과 2001년 졸업. 본교 통역번역대학원 한불번역학과를 2003년 졸업했다.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으며, 현재는 밤의서점을 운영하며 프랑스어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내 식탁 위의 개』, 『파리의 심리학 카페』, 『인간의 대지』, 『어린 왕자』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얼마 전 SNS에 ‘왓츠인마이백(What’s in my bag)’처럼 ‘왓츠인마이책장’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들이 속속 올라왔다. 남의 핸드백 안은 관심이 없는 나지만 책장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열띤 흥분을 누르며 그들의 책장에 꽂혀 있는 책 제목을 눈에 담았다. 그 순간 좋아하는 사람의 집에서 발견한 책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돌아가서 찾아 읽었던 시절이 떠올랐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와 가스통 바슐라르는 그렇게 내 책장에 입주했다. 물론 가까워지고 싶은 친구가 우리집에 오는 날이면 내 책장에 미묘한 변화가 일었다는 것도 고백해야 한다.

책장은 내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세나 월세생활자라면 2년에 한 번 이사 시즌에 살아남은 책들의 가치를 이해할 것이다. 거기엔 삶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있다. 내 책장의 책들을 가만히 훑어본다.

시선의 정면에 가 닿은 것은 밀란쿤데라의 ‘불멸’ 불어판이다. 대학 시절 내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씩 제하는 방식으로 살았다. 당연히 서울이라는 도시에도 대학생활에도 겉돌 수밖에 없었고, 그러는 사이 내 자아는 그야말로 앙상해졌다. 그런데 ‘불멸’의 두 자매 아녜스와 로라가 자아의 유일성에 다가가고자 선택한 두 가지 방식에서(쿤데라는 이를 덧셈법과 뺄셈법으로 기술한다) 눈에 불이 확 켜지는 것을 경험했다. 쿤데라의 언어로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게 되자 고집스러운 내 자아의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아래 칸에 꽂힌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역시 몇 번의 이사에도 책장에 살아남았다. 그 책에 인용된 버트란트 러셀의 소시지 기계 비유를 읽었을 때 느낀 흥분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늘 내 상황에 매몰돼 발이 묶일 때마다 이 구절을 떠올렸다.

"옛날에 두 대의 소시지 기계가 있었다. 한 대는 열심히 돼지고기를 받아들여 소시지를 만들었지만 다른 한 대는 ‘돼지가 나한테 무슨 소용이람’ 하는 생각으로 돼지에 대한 관심을 끊고 자기 내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연구를 하면 할수록 내부는 더 공허하고 어리석어 보였다. 결국 이 기계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낯선 풍경과 사람들, 세상의 무수한 사건들은 내가 관심을 기울일 때만 내 경험이 될 것이다. 여기서 뭔가 겪고 싶다면 근사한 풍경과 만남, 사건이 날 찾아와 주기를 기대하기 이전에 우선 나 자신으로부터 바깥으로 눈을 돌릴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김희경)

그 옆으로 불안의 대가인 나쓰메 소세키의 책들이 한 칸을 차지하고, 예술과 인생의 균형 을 가르쳐준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이 버티고 있다. 책장을 살펴보는 것만으로 내 인생의 시 기별 화두가 보인다. 미니멀리즘, 혼자 살아가기, 어른의 태도, 질병, 일과 나 사이의 거리두기, 미술관 순례, 여성, 글쓰기, 세계의 불평등에 관한 책들.

책장은 주인의 내밀한 욕망과 의지를 반영하기도 한다. 우치다 다쓰루는 그의 책 ‘도서 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에서 자크 라캉 의 말을 빌려 책장을 정의한다. 그것은 “전미래형으로 쓰여 있”는 책장이다. 프랑스어에서 전미래란 미래의 어느 시점에 완료된 행위와 상태를 가리키는 시제다.

"책장에 비치된 책이 ‘전미래형으로 쓰여 있다’는 것은 그 서가를 본 사람이 ‘아, 이 사람은 이런 책을 읽는 사람이구나, 이런 책을 읽는 취향과 식견을 갖춘 사람이구나’ 혹은 ‘이 사람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해 주길 바라는 욕망이 책장에 공공연하게 투영돼 있다는 뜻입니다." -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우치다 다쓰루)

그러니 책장은 주인의 취향과 역사를 넘어 그의 미래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아직 읽지 않은 책장의 책들은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장애 인권이나 동물권을 잘 모르는 사람이 관련 도서를 책장에 소장한다는 것은 작고 연약한 존재,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존재에 대해 배워가겠다는 작은 다짐이나 마찬가지이다. 페미니즘이나 빈곤, 차별의 문제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가 책장 한 모퉁이를 그 주제에 할애한다는 것은 낯선 세계와 타인의 고통을 알아가는 일로 미래의 자신을 끌고 가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인생의 화두가 담긴 나의 전미래형 책장은 확장돼 내가 운영하는 서점의 일부가 됐다. 25년 전에는, 먼 훗날 내가 다니는 학교 후문에 책방을 열게 되리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서점 이름은 밤의서점. 이 서점의 큐레이션은 나와 친구가 읽은 삶의 목록(고교 동창인 우리는 밤의 점장, 폭풍의 점장으로 불린다)이자 전 미래형 책장이다. 물론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기 전 연희동 밤의서점에서 만난 손님들의 취향과 고민도 스며 있겠지. 이제 이곳에서, 나와 당신의 책장 이야기를 마음껏 나누고 싶다.

김미정 밤의서점 대표·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