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연(緣)] 흩어진 구름 같은 인생이면 어때요, 괜찮아요

2024-05-05     박성은 HSBC코리아
                                                  박성은(특교·15년졸) HSBC코리아

 

출생 직후 뇌막염에 걸려 청각장애를 얻었다. 특수교육과를 2015년 졸업한 뒤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애플코리아를 거쳐 현재 HSBC코리아에서 재무 관련 업무를 맡아 일하며 여성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깨는 데 앞장서고 있다.

“제가 하는 말을 어떻게 알아듣죠? 너무 신기한데.”

사람을 처음 대면하면 으레 듣는 질문이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첫 번째로는 입 모양으로 읽어요. 단어마다 입 모양이 다 다르거든요. 그렇지만 ‘물’과 ‘무’처럼 입 모양이 같은 때도 있잖아요? 그럴 때는 두 번째로 당시의 상황과 배경지식을 활용해서 판단해요. 가령 상대방이 목말라 한다거나 근처에 폭포가 있다든지 하면, ‘물’이라는 단어로 판단하고 그렇게 듣는 방법이에요.”

여기까지 보면 대화 내용이 ‘일반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눈치챈 분도 계실 것이다. 그렇다. 나는 청각장애가 있다. 그것도 왼쪽 귀는 완전히 들리지 않고 오른쪽 귀는 겨우 들리는 중증 청각장애다. 왼쪽 귀는 120데시벨(dB) 이상만 들을 수 있고 오른쪽 귀는 95데시벨 이상만 들을 수 있다는데, 이는 각각 비행기 엔진과 기차 소리에 맞먹는다. 오른쪽 귀에 늘 착용하는 보청기라는 보조기기를 빼면 순식간에 내 세상은 조용해진다. 청각장애가 있는 삶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나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신생아 때 뇌막염에 걸려 청각장애를 갖게 되었고 그로 인해 매일 도전적이고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흔히들 청각장애라고 하면 단순히 귀가 안 들리는 문제만 있으므로 여러 장애 중 제일 그나마 나은(?) 장애라고 답하던데(장애인식개선교육 출장 갔을 때의 실화다!)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청각장애는 소리에 대한 피드백을 못 받기 때문에 발음이 불완전해질 뿐더러 의사소통이 힘들어지고 사회적으로 고립이 되면서 대인관계에 어려움이 수반되는 장애다. 간단히 말하자면, 돌발성 난청 등을 겪어서 갑자기 귀가 안 들리는 상황이나 에어팟 등의 ‘노이즈 캔슬링 모드’를 1년 365일 끼고 주변 사람과 일상적으로 생활한다고 생각해보면 조금 이해가 될 것이다.

장애가 있는 삶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그보다는 졸업 후 내가 걸어온 진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나의 주전공인 특수교육과의 진로는 보통 졸업하면 대부분 임용고시를 거쳐 특수교사가 되는 것이다. 나는 장애 학생을 가르치는 것도 좋았지만 장애 학생이 졸업한 뒤 취업하는 것을 도와주고 싶어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 입사했다. 6년간 근무하며 나 이외의 다른 장애인들이 취업을 잘 할 수 있도록 돕고, 기업의 장애인 채용에 관한 상담을 해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다른 산업계가 궁금해졌다. 새로운 세상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이유는 없었다. 물론, 이미 6년을 공단에서 근무했다 보니 편하게 정년까지 다니며 일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고민 끝에 결국 이직을 결심했다. 장애인도 얼마든지 능력껏 이직하고 비장애인과 함께 어울리며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이 주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이직은 마음처럼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꾸준히 자기 계발을 하고 공부한 끝에 애플코리아의 애플 리테일에서 스페셜리스트(Specialist) 로 일하게 됐다.

스페셜리스트는 애플 스토어에서 고객의 니즈를 들어주고 그에 맞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추천해 주는 일을 한다. 일종의 영업직과 비슷하다. “청각장애가 있는 사람이 의사 소통이 중요한 영업을 한다고?” 주변에서 걱정 어린 조언들이 쏟아졌다. 나는 그럴 때마다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이화의 예전 슬로건, ‘Where Change Begins’를 떠올렸다. 변화가 시작되는 곳. 고객을 응대하는 직무를 통해 청각장애인에 대한 긍정적인 변화를 이뤄내고 싶었다.

처음에는 “귀가 잘 안 들리느냐”는 고객들의 말에 많은 상처를 받기도 했다. 곧 이를 부드럽게 넘기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웃으며 대화하는 방법을 익힐 수 있었다. 나아가 내부적으로는 매니저와 팀원들에게 장애인에 관한 지식을 알려주고,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이 사용하기 쉽게 만든 애플의 ‘손쉬운 사용’ 기능과 관련한 여러 행사를 기획하기도 했다. 이후 공단에서 회계를 오래 맡았던 경력과 애플이라는 외국계 기업에서의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는 HSBC코리아에서 또 다른 변화의 시작을 펼치고 있다.

한 직장을 오래 다니는 것도 좋지만, 나는 여러가지를 경험해 보고 싶어 이러한 커리어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어찌 보면 한 영역의 전문가라기보다 ‘흩어진 구름’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애플의 창업자 고(故) 스티브 잡스는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은 점과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이 말을 곱씹어본다면, 흩어진 구름도 언젠가 모여서 뭉게구름이 되고 적란운이 되고 양떼구름이 될 수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학업, 취업, 사회생활, 이직, 그리고 장애 등으로 힘듦과 방황을 경험할 때, 모든 게 뜬 구름처럼 느껴질 때, 각자 좋아하는 예쁜 구름을 상상하며 그 힘듦을 흘려보내기를. 모든 이화인의 구름을 응원한다.

박성은(특교·15년졸) HSBC코리아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