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적 비평과 지식인의 역할 이성원(서울대 영문학과 교수) 「오리엔탈리즘」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콜럼비아대학의 에드워드 사이드 교수가 서울대 서남강좌의 연사로 초청되어 29일(금)·30일(토) 두차례에 걸쳐 공개강연을 하였다.

첫째 강연은 「문명의 충동인가, 정의의 충돌인가?」하는 제목으로 저명한 정치학지안 사뮤엘 헌팅톤 교수의 문명충돌론을 반박하면서 오직 동서문명의 조화와 공존에서 인류문명의 미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요지의 강연이었고, 둘째 강연은 「최근 미국의 문학비평의 추세」라는 제목으로 「이론-특히 불란서에서 유입된 이론-이 문학교육과 문학비평을 주도하게 되면서부터 마땅히 세속현실에 열려 있어야할 문학비평이 점점 더 상아탑의 전문인 집단의 전유물이 되어버린 추세를 실랄하게 비판하는 강연이었다.

첫번째 강연에서 사이드교수는 앞으로의 세계에서는 서구문명과 이슬람 문명 침 유교문명이 주도권을 다투게 될 것이라는 문명충돌론이 냉전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비판한다.

즉 소련과 동구사회주위권이 사라진 현시점에서 문명권간의 갈등과 충돌을 새로 거론하는 심리의 근저에는 일종의 자기실쳔적 예언을 통해 이념적 해게모니르 유지하고 싶어하는 서구인들의 강박관념이 있다는 것이다 .우선 「우리」와 「그들」의 구분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그것도 매우 우월주위에 입각한 영태로, 지키고자 하는 사고의 틀을 지적할 수있다.

그런데 「우리」와 「그들」은 어떻게 정의되는가? 대개는 얻던 전형화된 이미지 혹은 다분히 편견이 개입된 스테레오타입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어떤 문명 또는 문화도 하나의 이미지에는 담을 수 없는 법이다.

나아가서 어떠한 문명에 관해서건 순수하게 그 문명 고유의 것을 논하기가 쉽지 않다.

문명이란 본래 부단한 교섭과 상호영향속에서 이질적인 것을 흡수하면서 전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이드교수는 자칫 「충돌」로 귀결될 수 있는 방식의 문명에 대한 이해, 「우리」에 대한 편협한 정의를 벗어날 것을 오구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인류공통의 체험과 문화적 이해와 확대를 기반으로 다문화가 공존하는 비전을 제시한다.

결론으로 제시한 이 비전은 물론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상이다.

그러나 강연 후의 렬띤 토론이 반드시 그의 주장에 대한 몰이해를 반영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자신과 타자르 스스로에게 떠올리는 제현과정에 수많은 굴적과 왜곡이 개입할 수 있다는 지적은 매우 옳은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이 일관되게 제기하는 문제도 바로 이것이다.

) 또 자기정체성이란 개인의 차원이건 집단의 차이원이건 「상상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주체개념 또는 입장론이 반드시 비합리는 아니다.

더구나 제1세계, 그중에서도 미국의 태도 변화를 전테해야 하리라는 점을 피부로 느끽 ㅗ있는 이곳의 청중에게 그의 결론은 순진하게 삼킬 수만은 없다고 받아들여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두번째 강연은 미국의 문학비평이 이론화의 경재을 빌리면서 현실과 일상의 체험으로부터 스스로를 유리시켰으며 그래서 미국비평계의 판도는 마치 중세의 여러학파 또는 길드조직처럼 자체적으로만 교류하며 스스로를 재생산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앞의 강경에서의 결론이 이러한 진단과 어떻게 양립할 수있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아니 사이드교수로서는 일관된 입장이라 하겠으나 앞강연의 결론이 현실성이 없음을 스스로 노정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맑스즘이건 해체주의건 페미니즘이건 문화이론이건 권위의 비판은 순수하게 아카데믹한 작업으로나 존재하고 이론의 반성이란 이름하에 이론들간의 이중교배를 통해 새 이론을 낳는다.

그래서 문학교육은 이 아찔할 정도의 난삽함을 감당하는 방법으로 메뉴판의 음식처럼 여러 이론들을 제공하고 학생드로 하여금 마음에 맞는 것을 선택하게 한다면 이 박식한 무지 속에 이 전문화의 편집증 속에 탕정으로 열어놓게 하는 문학교육 본연의 소임도 현실적인 힘으로 구현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무엇보도 미국사회는 가령, 불란서면 불란서에서 새로운 관점이 대두되게 된 특정한 맥락에 대해 배려없이 그대로 유입하여 이를 비역사적인 것으로 전환한다고 그는 진단한다 .(이는 결코 새로운 견해가 아니다.

영국의자유쥬의 사상이 역사와의 역동적 관계속에서 출현한 것이었던데 비해 미국의 자유쥬의사상은 그러한 맥락과 무관하게 추구되어 왔다는 루이하트의 유명한 저술이 있다.

) 그리하여 이론은 구체적 상황에 응답하고 복잡한 현실을 다루는 방식으로서 즉, 지식인의 임무를 재규정하는 방식으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오직 문제해결의 수단으로서의 규칙들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이드교수는 쥴리앙 방다 이래로 계속 강조되어온,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과 더불어 기꺼이 방기되어온 「지식인의 임무」를 다시금 강조한다.

사이드교수의 강연은 외국의 이론을 공부하고 소화해 내야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시한다.

왜 우리 스스로를 이론의 수입상으로 격하시키는가? 왜 탈식민주의에 관한 논의차도 외국의 논의를 앵무새처럼 되뇌이는 방식으로 하는 것인가? 많은 반성과 부끄러움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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