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에서 쓰는 편지] 근대에서 읽는 오늘
[연구실에서 쓰는 편지] 근대에서 읽는 오늘
  • 김지은 기자
  • 승인 2004.11.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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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연구원 권보드래 연구원

희야. 어제 도서관 앞을 급히 뛰어가다 너를 만났다. 서두르던 참이라 손 흔들고 눈인사만 한 채 헤어졌었지. 그러고 보니 지난 번에도 도서관 서가에서 만났었구나. 그 때는 뭘 찾고 있었더라? 문학 서가 앞이었지? 자료 복사를 마치고 돌아나올 때 보니 넌 책상에 앉아 뭔가 열심히 읽고 있더구나. 네가 읽던 건 무슨 책이었을까?

백 년 전의 신문과 잡지를 읽기 시작한 지 한참 됐다. 처음 ‘대한매일신보’라는 신문을 읽기 시작한 게 10년 전쯤이니까. 그 사이 1900년대에서 1920년대까지 나온 신문·잡지를 두루 섭렵했다. 1930년대나 1950년대도 조금 들여다 봤고.

글쎄, 그게 무슨 공부냐는 질문을 심심찮게 받았다. 본래 전공이 한국 현대문학인지라, 시집이나 소설책 보는 데 더 열심이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들었고. 또렷히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있을런지 모르겠다. 그냥 신기하고 낯설면서도 충격적이었던 탓이니까. 무엇보다.

백 년 전 자료를 통째로 읽다 보면 낯선 장면에 자주 부딪히게 된다. 나라를 구하자는 말 한마디에 대뜸 손가락을 자르고 몸을 내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구두 한 켤레가 심각한 사치라 구두 훔치는 좀도둑이 극성이었던 시절도 있다. 신문 광고의 태반을 성병 치료제가 점령하기도 했다. 7천명이 희생당한 3·1 운동이 막 지나갔는데 뜻밖에 온 세계가 사랑과 평화의 시대로 이행하리라는 확신에 가득 차 오른다. 1930년대 후반, 파시즘의 폭압 아래서 난데없이 ‘유선형 세대’가 등장하기도 한다. 뭐든지 매끄럽고 세련되고 다치지 않게. 패션도 취향도 삶도 그런 식으로 끌고 간다고 비판받았던 세대다.

대체 이 모든 게 다 무엇일까? 이 자취를 좇다 보면 정보 정리에만 빠져버리기 쉽다. 신기하고 낯설다는 첫인상에 갇혀 버리는 거지. 이때 지식은 자족적인 취미가 된다. ‘나는 대체 왜 책을 읽고 글을 쓰는갗라는 질문은 초심자나 던질 법한 것이라고 여기며 저 멀리 버려 두고 말이다.

그러나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지식이 무슨 소용일까. 나는 지금 이곳에서 더 잘 살기 위한, 동시에 지금 이곳을 벗어나기 위한 힘으로 지식을 쓰고 싶다. 이 점에서 지식이란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어야 한다. 네가 지금 쓰는 논문, 그 밑바닥에도 너의 삶이 깔려 있기를! 언제 어디서나 배우는 자이기를­ 그래서 난 끝없이 학생이고 싶다.

<필자인터뷰>

우리 학교 한국문화연구원의 권보드래 연구원은 독립신문 등 근대에 발행됐던 신문으로부터 그 당시에 이뤄진 근대성의 흔적을 읽어내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당시 신문에 나타나는 근대성이 오늘날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과 이를 극복하는 방식을 연구 중이다. 그는 개념이 사유의 중요한 매개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민족·개인·사회 등의 근대개념어도 연구하고 있다.

그는 이화인들에게 “여자들만 있다는 편하고 자유로운 조건을 적극적으로 살려야 한다”며 “대학 시절에 믿을만한 친구를 많이 키우라”고 전했다.

그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연구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