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눈이 심하게 부어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눈의 고름을 짠 뒤 의사에게 왜 눈이 부었는지 물어봤다. 그러자 의사는 눈병 이름과 처방전을 영어로 적어주기만 했다. 나는 내 병명을 물어봤는데 아무런 설명없이 알 수 없는 처방전만 받으니 화가 났다. 의사에게 다시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결국 무시당하고 말았다.


내 병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치료받는 찜찜한 마음은 법원의 판결문이나 법전을 읽을 때 느끼는 심정과 비슷하다. 검사가 작성하는 공소장은 사건에 관계없이 한 문장으로 쓰여 있다. 복잡한 사건의 경우에는 길이가 길어져 이해할 수 조차 없다. 헌법재판소의 행정수도 위헌 판결 전문만 보더라도 한 번에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긴 힘들 것이다. 일반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되는 것이 중요한 판결문이 그들만의 암호처럼 공유되고 있다면 과연 누구를 위한 판결문인지 의문을 제기해 봐야 한다.


지난 9월, 개인회생제도 신청자들이 어려운 법률용어 때문에 서류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 법원까지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이에 법제처를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학술·의학·법률 용어를 쉬운 말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지만 쉽사리 진행될 것 같지는 않다. ‘공문서는 어려운 한자나 전문용어를 써야 권위가 서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구시대적 인식 때문이다.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전문 용어를 “그냥 ∼야”라고 얼버무릴 뿐 더 이상 부가 설명을 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에게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부분도 주저하다가 결국 수동적으로 받아 들이게 된다. 즉 그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권위의식이 그들만의 우월주의를 낳고, 그것이 결국 다른 사람을 움추리게 만드는 것이다.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말도 전문용어를 사용하여 말하면 그들의 권위가 세워질거란 생각은 그저 자기 만족을 위한 잘난 척일 뿐이다. 사람들이 그들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이유는 ‘대단한’ 전문용어를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몸에서 베어나오는 숨막히는 권위주의에 질식할 것 같기 때문이다. 왜곡된 권위의식은 그들을 ‘가까이 하기엔 너무 건방진 당신’으로 만들었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