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는 국경도 없다’는 말이 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말이다. 사랑은 국적만 극복하는 게 아니다. 나이도, 재산도 심지어 성(性)도 극복하는 게 요즘 사랑이다. 그만큼 사랑은 놀라운 능력을 가진,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감정이다.

그래서일까.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무비판적 긍정은 왜곡된 사랑을 낳고 있다. 그 왜곡된 사랑의 형태 중 하나가 바로 불륜이다. ‘불륜(不倫)’은 말 그대로 ‘윤리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다. 이는 사회적으로 약속된 규범을 어기는 행동임과 동시에 사회구성원들로부터 지탄을 받게 되는 사랑의 한 모습이다.

인간의 삶과 사랑을 그리는 드라마에서도 불륜은 흥미로운 소재다. 사람들은 드라마 속 왜곡된 사랑을 비난하면서도 그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다. 불륜에 대한 사람들의 ‘은밀한’ 열광은 드라마들이 불륜일색으로 획일화되는 원인이 됐다.

이 시대 ‘사랑지상주의’가 낳은 어두운 그림자 불륜. 드라마 속 불륜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드라마 소재로 불륜이 등장한 시점은 정확치 않다. 보수적이었던 과거, 드라마에 불륜이라는 반사회적 소재가 전면에 내걸리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만 남성중심·가부장적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주인공의 잦은 외도와 두 집 살림 등의 불륜이 그려지긴 했다. 그러나 이러한 설정은 남자주인공의 불륜보다 홀로 남겨진 여자주인공에 대한 연민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불륜을 소재로 했다고 보긴 어렵다. 1970년에 방영돼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동양방송 일일드라마 ‘아씨’가 대표적인 예다. 이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은 버젓이 있는 아내를 버려두고 다른 여자와의 결혼을 꿈꾼다. 그러나 드라마의 초점은 이 같은 남주인공의 ‘불륜’보다는 혼자 시부모님을 봉양하고 망나니 같은 남편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여주인공의 ‘희생’에 맞춰져 있다. 이에 「텔레비전 드라마 사회학」의 저자 오명환씨는 그의 책을 통해 “당시 불륜이라는 소재는 퇴폐 내용으로 여겨져 적극적으로 다뤄질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사랑에 대한 보수적 관념들이 조금씩 완화되면서 드라마 역시 다양한 사랑을 다루는 데 한층 자유로워졌다. 이런 흐름을 타고 불륜 또한 드라마 속에 빈번히 등장하게 됐다. 시청자들이 가족시간대 드라마 만큼은 불륜이라는 소재에서 벗어나자고 요구할 즈음, 기존의 불륜 드라마와는 확연히 다른 드라마 한 편이 방송됐다. 이는 1996년 MBC에서 방영된 ‘애인’이다. 드라마 ‘애인’이 다른 불륜 드라마들과 차별화 돼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이유는 극 전체가 미국의 ‘로맨티시즘’을 완벽하게 표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섹시함과 당당함을 가진 여성과 지적·물적 능력을 지닌 남성의 감각적이고 이성적인 불륜은 기존의 최루성 불륜드라마에 대한 통념을 깨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특히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여성의 열정적 외도를 묘사함으로써 여성의 불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제시했다는 평을 얻었다. 사람들은 이 드라마에 열광했고, 드라마 속 ‘로맨틱한’ 불륜이 유행처럼 번질 정도로 ‘애인’의 열풍은 거셌다. 때문에 당시 국회로부터 불륜을 조장한다는 질책을 받고 국정감사 대상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애인’의 불륜이 낭만적이고 분위기 있는 멜로였다면 2003년에 방영된 MBC 드라마 ‘앞집 여자’의 불륜은 시트콤을 방불케 할 정도로 발랄하다. 이 드라마는 불륜에 대한 기존의 진지하고 무거웠던 묘사 방식에서 탈피, 불륜 또한 경쾌하고 가벼울 수 있다는 점을 새롭게 시사해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얻었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시청자 권태완씨는 드라마 게시판에 올린 자신의 글에서 “불륜을 아무 것도 아닌 일처럼 다뤄 불륜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조장하고 있다”며 “드라마 속에선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실제 서로 맞바람을 핀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행복하게 살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또 유진씨는 “도덕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상 불륜은 어떻게든 정당화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꼬집었다.

이와 같이 ‘앞집 여자’는 불륜을 신파조로 다루지 않아 시청자들의 눈길을 부담 없이 잡아끌었다는 호평과 함께 ‘불륜을 희화화 했다’·‘가치관을 해이하게 만든다’는 비난을 받았다. 불륜은 아직도 민감한, 그래서 더 흔히 다뤄지는 소재임을 증명한 것이다.

2004년 현재, TV 속 불륜은 아직도 건재할까. 현재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에 대한 한 조사에 의하면 3개 주요 방송사의 드라마 중 불륜을 그리지 않은 경우는 KBS가 11편 중 5편, MBC와 SBS가 각각 6편 중 단 1편뿐이었다. 불륜이 드라마에서 빠질 수 없는 하나의 필수 요소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러한 드라마 속 ‘불륜 전성기’는 불륜이 더욱 다양하고 자극적인 형태로 양산되는데 한 몫 하고 있다. 이제 불륜은 드라마 전면에 배치되기도 하고 사건의 배경을 이루기도 하며 드라마 중심에서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너무 잦은 불륜의 등장에 일부 시청자들은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불륜이 필연적인 사건 전개의 수단이 되는 것을 넘어 드라마가 ‘뜨기’ 위해 꼭 집어넣는 별책부록처럼 과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성공회대 김창남 교수(신문방송학 전공)는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불륜이 문제시되는 것은 그것이 비도덕적인 행위일 뿐 아니라 비교적 쉽고 안정적으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상투적 수단으로 남발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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