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말로의 「인간조건」

민주언론시민운동연합 최민희 사무총장(사학·83년 졸)

80년대 구도서관 주변은 말 그대로 산이어서, 산길을 산책하며 친구들과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렇게 ‘널럴했던’ 학교가 이제는 비좁아졌다. 그에 반해 후배들의 분위기는 우리 세대에 비해 밝아서 나까지 환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79년은 18년간 집권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부하 김재규의 총에 비명횡사한 해였다. 다음 해에 광주사태가 터져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누구도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시대의 아픔을 어떤 식으로든 안고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즈음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독재자의 죽음, 무고한 광주시민들의 죽음, 시위 도중 낙사한 이웃 학교 학생의 죽음까지. 죽음을 고민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당시 사회를 감싸고 있었다. 적어도 젊은 우리의 관념 속에서 당시의 민중적 삶이란 죽음보다 못한 것이었다.
죽음이 무엇인가로 시작된 존재에 대한 물음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이책 저책 닥치는 읽는 과정에서 예수나 부처가 씨름한 근본 문제도 삶과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때 읽은 책들 중 앙드레 말로의 「인간조건」은 내 마음 속 자욱으로 또렷하게 남았다. ‘상해혁명’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죽어가는 여러 인간군상의 마지막 모습은 나를 전율케 했다. 자기 목에 총구를 겨눠 자살하는 테러리스트부터 죽는 순간까지 숭고한 동지애를 발휘하는 혁명가의 장엄한 최후까지 그 어디에도 하찮은 죽음은 없었다.

관념적인 열정에 사로 잡혀있던 내게 주인공 여의사의 다음과 같은 말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오늘 시집가는 가마 안에서 자살을 기도한 신부가 병원에 실려왔어요. 곧 친정어머니가 달려왔죠. 친정어머니는 ‘저 년은 죽을 복도 없는 년’이라며 너무나 서럽게 울더군요”

그후로도 오랫동안 죽음은 내 마음의 화두였다. 나는 주인공 ‘기요’처럼 체포된 뒤에도 동지를 위해 독약을 나눠 주고 적에게 죽는 것을 감수할 만큼 동시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죽음은 이 지점에서 사랑이라는 화두와 연결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사라진 인문대 사회과학동아리 ‘봄뫼’는 최민희 선배를 사회과학에 눈뜨게 한 공간이다. 사회문제 해결에 대해 적극적인 의지를 갖게 된 그는 82년 학내에서 ‘일본역사왜곡 항의시위’를 주도,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대학시절 전공인 사학으로 역사를 보는 객관적인 눈을 기른 것이 현재의 언론 감시·비평 활동에 큰 도움이 된다고.

그는 사람들의 치열한 사유가 만들어낸 보석인 책에서 세상의 장애물을 뛰어 넘는 지혜를 얻으라고 전했다. 이어 그는 후배들이 학창시절 동안 ‘나’를 탐구하며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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