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 I sleep in this side?"

"Sure."

밤이 됐고, 윌과 나는 서로 어느 쪽에서 잠을 잘지 정했다. 그런데 막상 “Good night”이라고 말하고 침대 왼쪽에 눕자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침대를 쓰다니, 불편하다. 슬쩍 윌 쪽을 바라봤다. 그런데 윌은 등을 돌린 채 침대 오른쪽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붙어서 자고 있는 것이었다. 너무도 불편해 보이는 윌의 등에는 ‘너랑 자기 너무너무 싫어’라고 쓰여 있었다. 나 역시 둘이 얼굴을 맞대고 잠을 자길 바란 건 아니다. 하지만 뭐랄까.  ‘나랑 자는 게 그렇게 싫은가?’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복잡했다.

새벽녘이 되자 조금씩 추워졌고, 이불 하나를 두고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 보통 남자라면 이불을 여자에게 양보한다.(아마도) 그리고 자신은 전혀 춥지 않다고 한다.(아마도) 하지만 윌은 이불을 내놓지 않았고 침대 가장자리에서 벗어나지도 않았다. 팽팽한 이불 아래에서 벌어진 신경전, 내가 졌다. 마침내 이불을 포기하고 침대 시트 밑으로 기어들어가자 윌은 기다렸다는 듯 이불을 가져가더니 돌돌 말고 잠을 아주 잘잤다.
 

미묘한 상황은 그 다음날 백화점에 가서도 진행됐다.

마리는 윌이 쇼핑을 할 때 꼭 필요한‘악세사리’라고 말했다. 자신의 남자친구는 어떠한 옷을 고르든지 잘 어울린다고 말해주지만 윌은 굉장히 정직하게 평가해준다고. 듣던 대로 백화점에서 윌의 평가는 정직했다.

마음에 드는 자주색 옷이 있어 몸에 대보고 어떠냐고 마리와 윌에게 물어봤다. 마리는 잘 어울린다고 말했지만, 윌은 인상을 찌푸리며 줄줄이 말하기 시작했다.

“Why don’t you try pink? You look old in that color.”

늙어보인다고? ‘What a bitch!’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탈의실에 가서 윌이 골라준 분홍색 옷을 입으며 이 불쾌함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것은 마치 나보다 훨씬 예쁘고 몸매 좋고 옷도 잘입는 여자친구와 쇼핑할 때의 기분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윌이 점점 좋아지기도 했다.

여느 서양 남자들처럼 느끼하지도 않았고(여기 남자들은 처음 만난 사이에도 윙크를 참 많이 한다. 적응이 되지 않는다.-_-;), 가끔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도 꽤 귀여웠다. 또 윌은 내가 다니기 시작한 학교에서 비슷한 코스를 예전에 다닌 적이 있는데, 그 코스에 대해서도 도움이 되는 충고를 해줬다. 의외로 나중에 하고 싶은 일에서도 나와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여행 내내 마리와 마리 남자친구가 앞에서 운전을 하고 나와 윌은 뒷좌석에서 함께 갔다. 처음엔 서먹서먹했지만, 조금 친해지기 시작한 이후로는 이야기도 많이 했다. 윌은 300곡도 넘는 음악을 하나하나 들려주며 내가 고개를 끄덕인 음악들을 나중에 씨디로 구워주겠다고 약속도 했다. 여타 남자에게는 없는 섬세한 부분이었다.

윌과 같이 시간을 보낼수록 의문은 커져만 갔다.
그는 정말 게이인가?
보통 남자에 비해 옷을 잘입고, 난색을 좋아한다는 것을 빼고는 정말로 평범했다.
 

마지막 밤 저녁식사에서 에피타이저로 나온 빵을 먹는데 윌이 손수 버터를 발라주었다. 차를 탈 때 문을 열어준 적도 없던 윌이. '어쩌면 그는 게이가 아닐지도 몰라' 라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조금 설렜다.
 

그러나, 그러나.

이후 벌어진‘게이 토크’에서 수수께끼는 모두 풀리고야 말았다. 샌드위치를 먹으며, 먼저 마리는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액세서리는 목걸이도 반지도 귀걸이도 아니다, 바로 자신의 ‘게이맨’을 찾는 것이다, 라는 화두로 게이 토크를 시작했다. 게이는 여자에게 가장 좋은 친구라고. 그녀는 윌이 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Oh, I found my gayman!”
 

그녀가 윌이 게이라는 것을 알게된 과정은 이렇다.

하나. 처음 그가 넥타이 아래에 분홍색 셔츠나 노란색 셔츠를 받쳐 입었을 때. 그리고 넥타이와 셔츠 색

이 아주 잘 어울렸을 때.

둘. 우연히 윌의 차에 타게 된 날 그가 ‘아바’를 틀었을 때.

‘아바’가 뭐 어쨌다는 거지? 하는 눈으로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나를 향해 마리는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Abba, Madonna, they are anthems.”

아바와 마돈나는 게이에게 애국가와도 같은 거란다. 그러고보니 차안에서 윌이 처음 들려준 노래가 아바의 ‘맘마미아’였다. 폭풍 같은 깨달음이 내 몸을 휩쓸었다. 윌은 낄낄대며 웃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윌에게 물어보았다.

"Are you sure that you’re a gayman for her?"

윌은 여전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마음을 깨끗하게 접었다.

식사가 끝나고 차에 탔다. 뭐랄까 마음 한구석이 아쉽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했다. 윌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바로 게이인 것이다. 여행 내내 이 단순한 명제를 깨닫느라 이렇게 힘들었다니.

윌의 씨디는 다 들었고, 이번엔 내가 한국 노래를 윌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자우림, 휘성, 이상은 등의 가수를 뒤로 하고 윌의 마음을 흔든 노래들은 ‘코리안 걸팝’이었다. 보아, 렉시, SES, 핑클 등등의 가수 중에서 그가 으뜸으로 친 것은 다름아닌 베이비복스의 ‘킬러’. 윌은 열번도 넘게‘킬러’만 반복해서 들었다. 그렇다. 아마도 평범한 남자라면 베이비복스의 ‘킬러’에 그렇게까지 매료되지 않을 것이다.

몬트리올 까지는 4시간 정도 남았다. 밤은 깊어갔고, 윌의 헤드폰에서는 여전히 가느다랗게 “오 너만이 그대를 내안에서 없앨 수 있어”가 들렸다. 흐뭇한 기분. 그렇게 나의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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