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놀드 슈왈처네거나 실버스터 스탤론같은 남자 좋아하세요?”
주위의 2∼30대 여성 중 아무나 붙잡고 이렇게 물어보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10명 중 9명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릴 것이다. 그렇다면 당황하고 있는 그들에게 “그럼 휴 그랜트는 어때요?”라고 물어본다면? 아마 그들의 눈빛이 금새 초롱초롱하게 바뀌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터미네이터’나 ‘람보’에서 미사일을 정면으로 맞아도 잠시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 적에게 바주카포를 쏴대며 벌판을 누비던 근육질의 남성들. 하지만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여성들이 원하는 영화 속 남자주인공의 모습이 아니다. 현대 여성에게 그들의 이미지는 ‘카리스마 넘치는 남성’이 아닌 ‘강한 척하는 아둔하고 미련한 남성’일 뿐이다.

미국의 시사일간지 ‘뉴욕타임스지’는 지난 10월1일자 기사에서 헐리우드 영화 속 영웅상이 강인한 의지와 육체적 힘을 지닌 남성형에서 사색적이며 감성적인 남성형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액션 영화에서도 민감한 남자들이 액션영웅으로 급부상하고 있다며 그를 대표하는 배우로 ‘스파이더맨’시리즈의 토비 맥과이어· ‘투모로우’의 제이크 길렌할· ‘트로이’의 올랜도 블룸· ‘알렉산더 대왕’의 리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꼽았다.

80년대는 아놀드 슈왈처네거·실버스터 스탤론 같은 근육질 우상이나, 해리슨 포드·케빈 코스트너 등 순정만화에서 금방 튀어나온 듯한 매력을 내세운 로맨티스트들의 시대였다. 90년대에 들어 브래드 피트처럼 예쁘장한 외모와 약간 반항적인 기질을 지닌 배우들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영웅상의 변화를 예고했다. 이같은 영웅상이 등장한 원인으로 뉴욕타임스지는 미국 사회의 여성화·메트로섹슈얼의 부상 등을 꼽았다.

그렇다면 2000년대 우리나라 여성들의 남성상은 어떤 모습일까? 서울 사회과학연구소 박진성 연구원은 “오늘날 여성들이 원하는 남성상은 자유롭게 내면의 심정을 표출해내는 인물”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극장에서도 여성을 행복하게 해주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과거에 여성들은 피 튀기게 싸우며 세력 다툼을 벌이거나 ‘절대적 우정’을 강조하며 서로 연대하는 남성들을 그저 바라봐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 여성들은 남성을 선택할 수 있는 주체가 됐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들은 여성의 환상을 충족시키고자 사력을 다한다. 그리고 입맛에 맞는대로 골라 잡으라고 제안한다.

최근 우리나라 영화 속 남자 주인공 중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누구나 비밀은 있다’의 이병헌이다. 이병헌이 맡은 ‘수현’이란 인물은 여성들의 이상적인 연애상대에 적합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는 부드럽고 자상하지만 동시에 도발적이며 열정적이다. 무엇보다 그는 여성의 ‘매력을 발산하고 즐길 권리’를 옹호한다. 순진한 처녀의 ‘도발’을 거쳐 유부녀의 ‘욕망충족’까지 이뤄내는 이병헌의 모습은 남성뿐 아니라 여성의 판타지까지 충족시킨다. 이처럼 영화에 여성의 이상과 욕망이 잘 반영되는 것은 여성주의적인 담론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젠 바람기 많으면서도 부드럽고 진지해 보이는 ‘휴 그랜트’같은 남성상이 여성의 흥미를 끄는 주인공이다. 휴 그랜트는 ‘러브액츄얼리’에서 비서와 사랑에 빠지는 영국 수상을 연기했다. 하지만 그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수상관저를 휘젓고 다니는, 외롭지만 쿨한 이미지의 영국 수상이었다. 그렇다면 줄리아 로버츠와 함께 나온 ‘노팅힐’에서는 어땠던가? 조용히 서점을 지키며 살던 그는 갑자기 나타난 여배우 안나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사랑에 있어서의 주도권을 대부분 안나에게 맡긴다. 이는 남녀관계에서 자율성을 얻고자 하는 여성들의 소망을 충족시켰다. 게다가 그는 여성들에게 마음으로 와닿을 듯한 인상을 주며 엄마나 누나가 된 듯한 심정, 보호본능까지 느끼게 한다.

여성에게 있어 남성의 의미가 변했 듯 영화 속의 남성상도 많은 변화를 거쳐왔다. 남녀 간의 마음이 연결되려면 먼저 서로의 마음을 열고 사랑이나 기쁨 뿐 아니라 외로움, 부족함까지도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여자를 들쳐업고 다니는 슈왈처네거나 스탤론이 독립적인 현대 여성과 마음이 통하는 사이가 되려면 가슴 근육에 힘부터 풀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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