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은 죽어서 과제를 남기고

요즘 대련엔 바람이 엄청나다. 그래서 아침에 샤워를 할 때마다 하루 종일 바람에 나부끼느라 얽히고 설킨 머리카락들이 한 움큼의 뭉치로 빠져나온다. 바람 때문이 아니라면 이는 필경 스트레스로 인한 원형탈모 초기증상일지도 모른다.

분명 이곳에서의 생활은 한국에서보다 즐겁고 편안할거라 생각했었다.

처음엔 홀로 지상 낙원에 떨어진 것 같은 착각도 했었다. 처음 접하는 문화, 나와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 약간은 다른 생김새, 독특한 향과 음식들…. 새로운 모든 것들 앞에서 가슴이 터질 것 같고 입은 연신 귀에 걸려있었다. 무엇보다 쫓고 쫓겨야 하는 복잡한 현실에서 잠시 떨어져 있어도 된다는 사실이 행복의 가장 깊은 곳에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물론 알고 있었다. 이곳에 온 목적은 '어학연수'라는 것도, 혼자인 만큼 절대 나태해지거나 풀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도. 하지만 어쨌든 오직 '말' 하나만 배우면 되지 않는가. 한국에서의 생활보다는 분명 여유로울 것이고, 또 한 번쯤 꿈꿔봤던 외국에서의 독립생활인 것이다. 묘한 설렘과 약간의 여유, 그리고 외적인 구속으로부터의 자유 정도는 확실히 보장받은 선물이라고 믿었다.

이 곳 역시 현실과 현실이 충돌하고 부셔지는 또 다른 현실임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실 착각을 버리는 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저런 환상들은 설렘으로 잠을 설치던 출국 전날까지만 품었는지도 모른다. 대련에 와서 곧, 새롭게 시작하는 생활이 가져다주는 행복만큼 같은 양의 과제가 주어졌으니까 말이다.

내게 과제를 준 사람은 짱라오스다. 아니, 내게 주어진 과제가 무엇인지 깨우쳐 줬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 과제를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나 자신의 선택이었지만, 어쨌든 중국어 제대로 '쏼라쏼라'해보고 싶어 왔으니 안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게 한계라면 한계다.

'학문만큼 솔직한 게 없다, 열심히만 하면 된다'는 믿음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열심히 하는 것인지에 대한 답을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초등학교 6학년 때 '1등과 꼴찌는 공부 방법 차이'라는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그 공부 방법이 여기서도 문제의 핵심이다. 반복하건데 그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이 짱라오스다.

"너네 나이에 6개월 공부하면 웬만해선 다 6,7급 딴다. 문제는 말을 할 줄 아는 6,7급이냐 말 못하는 6,7급이냐 그거지. 말 못해도 책만 파면 6,7급 따거든. 1년 생각하고 왔으면 9급은 따가야겠네? 말, HSK 두 가지 다 잡으려면 절대 시간 많은 거 아니다"

대련에 도착한지 이틀째 되던 날, 짱라오스가 해준 말 한 마디 한 마디 앞에서 나의 '환상과 착각'들은 산산이 부서져 '현실과 과제'라는 이름으로 재조합 돼버렸다.

(슬럼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어 여유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부법은 다시 다음 글에서. 무거운 마음 덜고자 가벼운 얘기 '보태기'에 실었습니다)

보태기 ) "一起去散步吧!(같이 산보가자)"의 의미

'중국인 친구 하나 잘 사귀면 재미있게 중국어 공부를 할 수 있다'

어디서 흘러나오는 얘기인지 몰라도 누구나 이런 얘기를 주워듣고 온다. 때문에 수업이 시작되기 전 8월 한 달 동안, 기숙사의 거의 모든 유학생들이 중국인 친구 찾기에 혈안이 됐었다. 나와 쯔씨엔, 언메이, 은잉, 인허...이 다섯 여자도.

7시 반이면 우리는 어김없이 산책을 나갔다. 누군가 한 사람이 "一起去散步!(같이 산보가자)"라고 하면 다섯 여자는 정말 일사분란하게 준비(?)를 마치고 모였다. 산부(散步)라…. 한국에선 정녕 없던 습관이다.

그런데 또 왜 하필 7시 반인가. 여기는 밤10시면 온 학교가 시등(熄灯=불을 끄다)을 한다. 또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한국보다 밤이 빨리 찾아온다. 8시, 9시면 이미 한국의 11시 마냥 깜깜해진다. 하루의 마무리를 준비하면서 가볍게 산책하기엔 7시 반이 적당한 것 같다. 무엇보다 이쯤이 교정에 남학생들이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시각이기도 하다. 물론 입에 침 좀 바르고 꼭 남학생만을 노린 것은 아니라고 덧붙이고 싶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우리에게 한 동안 '산부=작업'이었던 사실만큼은 고백해야겠다.

이 한 달 동안 산보를 하면서 확실히 중국인 친구를 많이 사귀었다. 다만 다섯 명이 몰려다니면서 그 때 그 때 한명의 중국인만 사귀었기 때문에 1:1의 개인적인 만남이 없었다는 것이 아쉽다면 아쉬운 부분이다. 그렇다고 중국에서건 한국에서건 알아주는 미모를 겸비한 것도 아닌 내게, 그렇잖아도 소극적인(혹은 점잖은?) 중국 동북지역 남성들이 먼저 말 걸어올 것은 기대조차 하면 안 된다. 아무튼 이래저래 그다지 큰 실속은 없는 사귐만 거듭해온 내게 누군가 '중국에서 먹히는 작업'이라고 알려준 방법 두 가지 소개한다.

-중국의 화폐단위를 이용하라-

앞서 한 번 중국의 화폐 단위를 언급했었다. 그 때 덧붙이지 않은 내용을 잠시 설명하고 넘어가야 겠다. 먼저 중국에서 내가 본 돈의 종류를 소개한다.

최하위 단위인 分단위의 지폐와 동전이 있다. 중국엔 똑같은 가치의 돈인데 동전/지폐 두 가지 방식으로 통용되는 것들이 있다. 가령 우리는 500원은 무조건 동전이다. 하지만 중국은 동전도 있고 지폐도 있는 셈이다. 1元도 마찬가지다 동전도 있고 지폐도 있다. 그리고 1毛짜리 동전, 2毛짜리 지폐, 5毛짜리 동전과, 2元짜리 지폐가 있다. 5元, 10元, 20元, 50元, 100元짜리는 모두 지폐다. 여기서 중요한건 2元짜리 지폐, 그리고 버스다.

앞서 중국의 버스비가 1元 (2元짜리고 있다)이라는 얘기도 했었다. 그래서 버스비를 내기 위해서 돈을 챙길 때 보통은 5毛짜리 동전 두 개나, 1元짜리 동전이나, 1元짜리 지폐를 준비한다. 이게 통상적이다. 그러나 작업을 준비할 때는 다르다. 2元짜리 지폐를 준비하는 것이다. (혹은 상비한다)

이미 이 쪽 분야에 도 통한 사람들은 눈치 챘을 거다. 그렇다. 버스 정류장에서 먼저 탐색의 과정을 거쳐 목표 대상을 선정한다. 그리고는 외국인 특유의 어눌하고 순수한 표정과 말투로 묻는다.

“不好意思呀。我想坐公共汽车,可是我没有零钱,只有两块钱的。你到了什么车站下车吗?” (미안한데요, 제가 버스를 타려는데, 잔돈은 없고. 2원짜리밖에 없네요. 어디까지 가세요?)

이러면 상대가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럼 그의(혹은 그녀의) 목적지가 어디든 무조건 나도 거기 간다고 하고서는, 상대의 1元짜리를 받고 버스에 동승한다. 그리고 함께 내려 그의 목적지까지 동행한다. (짧은 중국어로나마)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친밀감을 높인 후,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말한다. '오늘 일 고맙기도 하고, 유학 와서 공부하는 것 빼고는 뭐하고 지내야 할지도 몰라서 친구를 사귀고 싶다. 나중에 밥이나 같이 먹자. 전화번호 좀 알려줄 수 있냐?'고. 웬만해선 알려준다. 그들 입장에서 외국인(비록 생김새는 비슷하지만)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재밌는 듯하다. 이렇게 해서 좋은 인연으로 이어지면 좋고, 아니면 다시 2元짜리를 주머니에 찔러 넣는 거다.

여기까지가 첫 번째 방법이다. 나는 아직 시도해 보지 않았지만, 나중에 말이 좀 더 수월해지면 나쁘지 않은 방법인 것 같다.

두 번째 방법은 간단하다. 이 역시 돈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먼저 설정은 길을 물어보는 상황이다. 주머니 속에는 돈과 목적지의 이름이 적힌 메모지가 함께 들어있다. 길을 가다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면 다가가 묻는다.

“问一下,这地方怎么走?”(뭐 좀 물어볼께요, 여기 어떻게 가나요?)

라고 하면서 주머니에서 목적지 이름을 적은 메모지를 꺼낸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자연스럽게 주머니 속의 돈을 함께 꺼내 땅에 떨어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돈의 양은 여러 사람이 토론한 결과 약 700元~800元 정도면 적정하다고 결론이 났다. 사실 700원이면 우리나라 돈으로 약 10만원 돈이다. 한국이라면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돈인데, 여기서는 확실히 엄청나게 큰돈이다. 웬만한 월세방 하나 구할 수 있는 돈이니까.(물론 베이징이나 상하이로 가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러나 이 방법은 한계가 있다. 일단 돈 보고 접근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일 가능성은 일반적인 경우에 비해 낮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련은 바람이 정말 심하게 분다. 자칫 때맞춰 바람이라도 불면 괜히 한 달 생활비만 날리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위 두 방법은 2~4살 위의 오빠들이 알려준 방법이다. 개인적으로는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언니의 한마디가 더 확실한 방법인 것 같다.

"뭐하러 그러냐. 그냥 가서 친구하자 하면 전화번호 가르쳐 주더만"

예전에 자연과학영역 통합교과 교양 수업 중에 배운 내용이 생각난다. 누구의 무슨 이론인지는 모르겠고, 과정이 간단한 이론이 진리에 더 가깝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사람 사귀는 것도 가장 솔직하고 가장 명쾌한 방식이 더 잘 통하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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