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월엔 나가지 마!
1.8월엔 나가지 마!
  • 이유진 통신원
  • 승인 2004.09.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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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사를 앞두고 누구나 한 번쯤 들르는 곳이 점집이라던가. 그렇다면 아직까지 내 인생에 큰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점집은커녕, 학교 앞에 널리고 널린 사주카페 문턱조차 밟아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중국행 비행기를 타기 며칠 전, '1년 후 귀국했을 땐 사주카페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염려(?)에 친구들과 사주카페를 찾았다.

자리잡은 지 한참이 지나서야, 사주 봐주는 아저씨가 왔다. 생일 순으로 내 사주풀이를 제일 먼저 했다. 간단하게 사주풀이를 옮기자면, 건강.돈.남자 3복을 두루 갖춘 나무랄 데 없는 사주란다. 에헤라, 좋을시고! 단 한 가지 걸리는 말이 있었다. "올해는 아주 안 좋아, 8월엔 어디 나가지마!"

그러나 나는 이미 9월 학기 중국 어학연수를 위해 대련(大连)행 비행기 표를 사둔 상태였다. 또 사주풀이를 곧이 곧대로 믿는 아메바 수준의 순수함을 갖고 있지도 못한 탓에 8월16일(월) 오전8시30분 난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 시간 후 공항에 도착한 나는 환전도 하고, 아침밥도 챙겨먹고, 출국카드도 작성하고 이런 저런 절차를 챙기면서 12시 비행기를 기다려야 했다. 웬만한 절차를 마치고 슬슬 화물을 부쳐 볼 요량으로 화물칸으로 갔다.

'대련행 12시 비행기 지연'

스케치북을 부욱-찢은 듯한 백지에 성의 없이 휘갈긴 10글자가 화물칸 창구 표지판에 곧 떨어질 듯이 헐렁하게 붙어 있었다. 밑도 끝도 없는 10글자짜리 설명으로는 98% 부족했기에 직원에게 물었다.
"그럼 비행기 언제 뜨나요?"
"그건 우리도 모르죠, 비행기가 와봐야 알아요."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성의 없는 공고문에 이어, 역시 성의 없는 답변. 나는 재차 물었다.
"그럼 몇시에 알 수 있는데요?"
"그러니까 그걸 모른다구요, 일단 2시에 다시 와보세요."

물론, 중국항공 연착이 하루 이틀 얘기가 아니라는 건 나도 들어서 안다. 그러나 항공사 직원이 '중국항공 이러는 거 처음 보냐'는 식으로 저렇게 당당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약간 울컥하는 마음이 일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초전인 줄 알았다면 짜증도 화도 좀 아껴둘 걸 그랬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어쨌든 나는 시킨 대로 2시에 다시 화물창구로 갔다. 이번엔 4시에 다시 와보라면서 식권을 내준다. 또 다시 시킨 대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한 숨 자고 공항 3층엔 어떤 가게들이 들어서 있는지 다 외웠을 쯤 다시 화물창구로 갔다. 이번엔 6시에 다시 와보란다. 지쳐 쓰러져 가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당당한 말투, 미안해 하는 표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얼굴로 말하는 여직원. 초등학교 바른 생활 교과서 한 귀퉁이에 적혀있을 법한 구절을 상기했다. '착한 어린이는 친구를 때리지 않아요'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 여직원을 한 대 때렸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한번 꼬집긴 했을 거다.

결국 대기 시간만 줄잡아 8시간(오전 9시30분 공항도착을 기점으로)을 보낸 후에야 화물을 부칠 수 있었다. 6시, 화물 접수를 받으면서 직원이 역시 건조한 목소리로 당부키를 "6시 반까지는 꼭 탑승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네에, 제발! 나도 원하는 바요!" 라고 외치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네에, 제발, 제발요!

드디어 출국 심사대를 지나 문 하나만 통과하면 비행기에 오를 수 있는 대기실에 다다랐다. 금방 탑승할 것이라 믿었기에 배낭도 내려놓지 않은 채, 문이 열리고 빛이 쏟아지기만을 기다렸다. '곧 열릴거야, 곧 타라고 하겠지.' 참을 인(忍)자를 100번도 더 썼을 법한 시간이 흘러흘러 7시30분. '중국 항공은 원래 연착이 잦다더라'는 말로 화를 다스리며 항공사 측에 면죄부를 씌워줬던 승객들도 이 쯤 되서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업차 비행기를 타려던 사람들은 일을 다 망쳤다며 소리치기 시작했고, 대한의 전형적인 어머니들은 새벽부터 식구들 챙겨 먹이고 바리바리 짐 싸느라 흘린 땀방울이 눈물방울로 변하는 듯 했고, 여행가는 할아버지들은 그저 허탈한 듯 입만 쩍 벌리고 있다 묘한 타이밍에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시간은 또 다시 흘러 흘러 8시. 사람들은 이제 '일단 밥이라도 달라'며 비굴해지던 시점이다.

아침에 일어나 혹여나 비행기를 놓칠세라 부산하게 움직이던 12시간 전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기가 막히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비행기를 탈 듯 말 듯한 긴긴 기다림은 마치 오줌보가 터질 듯 말 듯한, 재채기가 나올 듯 말 듯한 간질간질하면서도 짜증이 확~솟구치는 그런 시간이었다. 사실 오줌을 참느라 보낸 30분에 비해 정작 편안해 지는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30초면 충분하고, 15초간 간질간질 하다가 재채기가 뿜어 나오는 시간은 0.5초도 안 되는 것처럼, 12시간을 기다린 내가 대련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1시간이면 충분한 것을.

어쨌든 8시간을 지각한 비행기가 사과를 할 리도 없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열리는 문을 한 동안 벙~해진 채로 바라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비행기에 올랐다. 잠시 후 좌석을 찾아 앉은 내 귀에 울리는 한마디, 그리고 에코(Echo)가 있었으니,

"8월엔 나가지마, 나가지마, 마마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