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의 이해」우수과제물

   ․ 중학교 시절 새로 부임하신 총각선생님이 수업을 하시다가 큰 방울 침을 튀기는 것을 보고, 또는 점심시간에 교무실에 갔다가 식사 후 트림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심하게 충격을 받아 며칠동안 말을 잃었다.

   ․ 소시지를 보고 남성의 페니스를, 떠먹는 요구르트를 보고 코를 연상하는 내가 역겹게 느껴진다.

   ․ 지난해 개봉한 ‘오스틴 파워’는 화장실 유머의 결정판이었는데, 직장에 나가지 않고 영화관으로 몰려든 관객들로 그 명성을 날린 ‘스타워즈 에피소드1’의 흥행기록을 단번에 깼다.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그러나 애정 어린 시선을 잃지 않은 코믹시트콤 ‘순풍 산부인과’는 몇 년째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위와 같은 현상들에 어떠한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시에 나타난 성(聖)과 속(俗)’을 비평의 주제로 정하게 돈 것은 이러한 일련의 상황이 어떤 관련성이 있다고 인식하는 데에서 출발하였다. 나는 위에서 두 번째까지는 키치(Kitsch)에 의한 것이고 그 나머지는 반키치(Anti-kitsch)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즉 우리가 성과 속을 뒤집음으로써 충격을 주는 시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순풍 산부인과’에서 무식하고 무례한 행동을 서슴치 않는 병원장(오지명 분)을 보고 박장대소할 때의 그것과 다르지 않고, 우리가 키치적인 태도에 일침을 가하는 안티 키치의 정신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스러운 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나 태도를 신랄하게 풍자하는 것은 우리에게 충격과 환희를 안겨준다.

   이제 사물은 그 사용가치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뉘앙스와 상징적인 의미를 갖게 됐다. 예를 들면 각설탕 집게는 위생적인 목적으로 인식되기보다 일정한 계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키치는 이제 일상생활의 도처로 침투해 가는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으며, 부르주아의 가치체계 속에 깊숙이 침투해 그들의 행동양식과 생활방식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부르주아의 가치에 친숙해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키치는 바로 평균적인 감수성을 지닌 인간들에 의해, 평균적인 인간들을 위해 만들어지며 바로 그들은 부르주아 사회의 번영을 향수하고 있는 것이다.

 

  키치적인 사물은 넘쳐흐르는 장식으로 우리의 기분을 전환시켜준다. 그것이 다양한 영역의 키치가 공유하는 보편적인 성격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부조화의 조화라는 보편성이다. 누구나 이러한 키치의 경향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핑크색이나 푸른색과 같은 부드러운 색상, 규칙적인 화음, 아버지다운 아버지…. 이런 것들에서 사람들은 편안함과 쾌적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이 주는 행복 속에 안주해 삶을 영위하고자 한다. 따라서 일상생활의 도처에 숨어있는 키치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쉽지가 않다. 문학, 영화, 음악, 미술 등의 예술 영역에도 키치가 있다. 중산계급이 번영하게 된 결과, 그들의 낭만주의적인 심리 상태에서 출발한 키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가장 두드러졌다. 키치 예술의 발전이란 다양한 양식을 축적해 그 양식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에 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술영역에서도 반키치적인 요소가 더 어필한다. 처음에 예로 들었던 영화 ‘오스틴 파워’에서는 실험실에서 똥과 커피를 나란히 놓고 끓이다가 주인공이 커피 대신 똥을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정말 추잡함의 극치라고 할 수 밖에 없지만 최근에는 그런 류의 코미디가 다반사다. 문학에서는 똥이라는 단어가 점(…)으로 표시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이제는 거침이 없다. 가장 정제된 언어만을 사용하는 문학 장르로 인식되는 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란일까 황토빛
내 몸을 쉴 새 없이 빠져나가
새로이 펼쳐지는 저 빛깔 좋은 세상
나의 육체를 쥐어짜는
시원한 비 같은 것 눈 같은 것
천둥을 보듬고 저 밑

파문을 일으키는 폭동일까
밥알이 뭉개지고 고춧가루가 제멋대로
흩어지고 병든 채소들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아, 그것은, 어두운 뱃속에서 자리 잡지 않겠다는
출가일까 이 세상 더 넓은 곳에
제 색깔대로 뿌려져
자유로이 썩어가겠다는 고행일까
(후략)

 

   차창용 시인의 ‘설사’에서 첫 번째 연과 두 번째 연은 우리의 키치적인 태도를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밥알이 뭉개지고/고춧가루가 제멋대로/흩어지고 병든 채소들이 갈기갈기 찢어지고’하는 대목에서 설사를 해 본 사람이면 누구든 그 광경이 떠올라서 역겨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시인은 설사의 고통과 형상을 인생역정에 너무나도 잘 비유하고 있다. 게다가 배변작용 중에서도 가장 격렬한 설사라는 소재는 배설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나타내기에 얼마나 강렬한가. 우리는 똥이라는 가장 더럽게 인식되는 것에서도 아니 그래서 더욱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똥과 설사하는 고통에 애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더럽거나 추한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역방향으로 상상력을 펼칠 수도 있다.

 

당신 벌린 입이 둥글고
배꼽이 항문이 내 아버지의
무덤이 둥글다
밥그릇과 국그릇이 둥글고
내일 아침 개나리 위에 맺는 이슬이 둥글다
아버지의 아들답게 나는
내일 아침 목련 위에 맺는
이슬 속에 내 무덤을 만든다

(중략)

입을 동그랗게 한다
신화를 완성하기 위하여
그때마다 쟁반 같은 달이 뜨고
아버지의 무덤이
달 속에 보인다 완성된
본능이 계란 노른자가 보인다.

아버지-
아버지-

 

   기도할 때와 똥을 눌 때 똑같이 무릎을 꺾는다고 표현한 시처럼 이 시에서도 성과 속은 하나의 공통항을 가지고 있다. 먹는 입과 배설하는 항문, 아버지의 무덤과 목력 위에 맺힌 아 침 이슬, 신화를 완성하기 위한 달이 ‘둥글다’는 점에서 외형적 조건이 같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동등하게 위치시킬 수 있는 것은 단지 모양이 같아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이 일직선상에 있을 수 있다는 것, 마치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서로 반대되고 양립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한군데에 뒤엉켜 있는 관계라는 점을 암시한다.

 

   가장 성스러운 것으로 인식되는 것은 종교이다. 물론 종교에도 키치가 존재한다. 종교적 키치에 관해서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한 부분을 인용하려고 한다. 소설 속 작가는 어린 시절 귀스타브 도레의 그림이 든 아이들을 위한 구약성경을 본 경험을 이야기하였다. 거기에서 하느님은 두 눈과 코와 긴 수염을 가진 노인이었는데 그는 하느님이 입이 있으니 반드시 음식을 먹을 거라고, 하느님이 먹는다면 창자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부분에서 그는 자신이 종교심이 깊은 집안 출신도 아니지만 하느님이 창자를 생각한다는 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것 같이 느꼈다고 한다. 즉 어린 나이에 벌써 똥과 신은 양립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 인류학에는 이런 의문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똥의 신학적 정당성에 대해선 두 가지 열쇠가 있는 셈이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전혀 대변을 보지 않았거나 혹은 인간이 똥을 더러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거나. 어쨌든 창세기신화는 존재와 절대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종교적인 키치는 똥을 부정하고 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언론정보학 9894074 이지선

 

   소감문

   아무리 교양과목이라지만 한국현대시의 이해를 수강한 것은 나에게 거의 모험이었다. 친구들이 “문학소녀가 되려구?”하며 놀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익숙한 분야도 아닌데다가 분량이 만만치 않은 만큼 평소에 관심이 있고 흥미 있는 주제를 고르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번 주제는 평소 제일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인 ‘순풍산부인과’에서 착안했다. 성을 가장하고 사는 우리들에게 가장 속된 것이 충격과 카타르시스를 준다는 점에서 현대시의 경향과 ‘순풍산부인과’는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잘 어울리는 키치라는 개념을 도입했고,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인용해 성과 속의 무게 대비를 서술하는 방식으로 리포트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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