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사무엘 울만은 그의 시 ‘청춘’에서 ‘나이를 더해가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고 했다. 이 시에 의하면 이상이나 목표를 잃어버린 채 ‘거짓된 이상’을 추구하고 있는 나는 정말 심각한 조로증을 앓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대학에 진학한지 3년이 지난 최근에서야 나자신에게 ‘왜 대학에 왔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대학에 입학했던 당시를 떠올려보면 남들이 정상이라고 여기는 코스에서 벗어날 경우 쏟아지는 눈치 세례를 받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아니면 대학생이라는 집단에 속해 으시대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니 심리학을 전공해 아동치료사가 될 것이라는 둥, 나라를 빛내는 학자가 될 것이라는 둥 대학 입시 면접장에서 사뭇 진지하게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대학이란 명찰을 달기 위해 내세웠던 거짓된 목표였기에 결국 입학과 동시에 사라져버렸다. 진로를 고심하는 지금도 ‘어떤 직업이 번지르르해 보일까’란 생각이 은연 중에 고개를 들고 있다. 언제부턴가 나는 내 행복보다 남들을 더 의식해 가장된 목표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럴듯한 목표 중에서도 더 괜찮은 목표를 골라내는 작업을 끊임없이 해왔다.
어렸을 때는 눈길에 닿는 모든 것이 내 몸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목표였었다. 작고 뚱뚱하고 먹을 것을 지독히도 좋아한다는 사실을 잊은 채 선천적으로 마른 몸매에 끊임없이 다이어트를 해야하는 발레리나를 바라기도 하고, 무척이나 좋아하던 떡 가게 사장이 되거나 떡 가게를 운영하는 남자와 결혼할 것이라고 다짐했던 꿈까지. 오히려 그때의 목표들이 내게 도전할 용기를 주었고, 때로 목표를 쫓다 만신창이가 돼 볼품없어져도 곧 다른 성장을 향해 일어서게 하지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한 쪽 입꼬리만 올라가는 ‘나이키’ 웃음을 짓는 때가 많다. 이것저것 재지 않고, 그저 되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만이 가득한 이상을 찾아내기엔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현실성 없고 볼품없던 예전의 꿈들을 끈질기게 생각하며 슬그머니 양쪽 입꼬리를 올리곤 한다. 그 꿈들은 조로증에 걸린 내가 치유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이제부터라도 조로증에 걸린 나를 치료하려 한다. 단조로운 심장의 울림이 흥분의 리듬을 탈 때까지 다소 무모하더라도 나를 위한 목표를 찾기 위해 세상을 한껏 뒤져보련다. 지금 내 눈은 흐리멍텅하고, 어깨는 오그라든 데다가 손과 발은 힘없이 떨리고 있지만 치유된다면 눈은 또릿해지고 심장은 팔딱거리리라. 지금의 나는 실패하면 처절하게 절망한다. 그러나 조로증을 치유한 뒤의 나는 내 목표가 남에게 어떤 평가를 받든 신경쓰지 않고, 도중에 실패하더라도 희망 섞인 가벼운 절망만 경험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 볼품없는 글은 나 자신에게 주는 첫번째 처방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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