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나는 사람들이 한 덩어리로 된 육지 위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걷고 걸으면 누구에게든지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무리 멀리 있는 사람이라도 열심히 발품을 팔고 목청을 높이면 언젠가는 나의 이야기가 그 사람에게로 가 닿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전학을 갔다. 이미 완성된 세계에 뒤늦게 편입된 나는 옆에 있는 아이에게도 쉽게 말붙이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았다. 마치 거대한 육지 옆에 있는 작은 섬에 혼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최초로 경험한 불연속. 마구 걸어서 그 육지에 도달하고 싶었지만 육지와 섬 사이를 가르는 깊은 바다 앞에서 겁먹은 발걸음을 멈췄다.
중학생이 되자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낯설음이 주어졌다. 반 아이들은 신속하게 무리지어 몇 개의 섬을 만들었고 나도 무사히 그 중 하나로 들어갔다. 점심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각자의 섬을 찾아가 도시락을 펼쳤다. 이 시절의 섬은 이상하게도 결속이 강해 그 섬이 곧 나고, 내가 곧 그 섬이었다. 똑같이 행동하고 똑같이 생각함으로써 편안함을 느끼는 일종의 ‘쌍생아 놀이’였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나는 어떤 섬도 나와 일치될 수 없음을 느꼈다. 나의 정체성과 섬의 정체성이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섬 속에 다시 나만의 섬을 만들었다. 초등학교 때처럼 외롭지도 않았고 다리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자의식이 유난히 강했던 그 시절에는 ‘나’가 나의 화두였다.
그리고 지금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은 다들 각자의 섬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동안 사람들은 어떤 책 제목처럼 ‘나는 너가 아니고 나’임을 깨달은 걸까. 그렇다면, 자신의 섬을 둘이 공유할 수 없는 것은 사실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소통의 열망을 느낀다는 것이다. 피히테는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만 사람이다’라 했고 김춘수는 그의 시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비로소 꽃이 되었다’고 했다. 아무도 나를 규정지어주지 않으면 나만의 섬에 표류하는 이름없는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모순이 생겼다. 우리 사이에 필연적인 불연속이 존재하는 데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불러 의미가 되고 싶다. 그리고 이왕이면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질을 어겨가면서도 한 섬에 둘이 서보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연애같은 것. 두 사람은 서로의 모습에 맞추려고 좁은 땅 위에서 애를 쓴다.
하지만 한 섬에 선 두 사람은 더욱 여실히 서로의 차이점을 느낄 뿐이다. 사랑이라는 가장 깊은 공유행위 속에서 일체감을 느낄 수 없을 때 생기는 단절감은, 오히려 더욱 깊고 치명적이다. 결국, 사람은 자신‘만’의 섬을 확인하게 된다. 소통의 열망은 서로의 섬으로 무모하게 넘어가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된다.
차라리 우리는 적당한 곳에 다리를 놓을 수 있도록, 들쭉날쭉한 서로의 섬 모양을 관찰해야 한다. 바다의 깊이를 측정하듯 서로의 차이를 냉철하게 봐야 한다. 결국 우리의 관계는 연속된 넓은 육지나, 점점이 흩어진 섬들의 집합이 아니라 튼튼하거나 부실한, 편평하거나 울퉁불퉁한, 넓거나 좁은 여러 종류의 다리인 까닭이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건너지 못할 바다’뿐 아니라 ‘다리’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리는 도달할 수 없는 육지에의 가능성이며 관계를 갈망하는 인간의 소산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다른 사람들의 섬에 다리를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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