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글 -언니네 편집팀 시타씨

세상이 변하길 바라지만 변하기 전까지는 스스로 몸조심해야 한다며 ‘여성용 예방법’을 뒤적이는 일. 이런 분열적인 상태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이 달빛시위에 가는 발걸음을 그리도 가볍게 만들었을까? 지난 8월13일(금) 밤 종로 일대에서 진행된 달빛시위는 내가 경험해 본 시위 중 가장 ‘신나는’ 시위였다.

시위 장소에 도착하자 더운 날씨에도 흰 소복과 귀신 분장을 하고 앞장서 걷고 있는 자매가 먼저 눈에 띄었다. ‘일찍 일찍 들어가라고? 너나 일찍 들어가!’·‘나는 공포를 학습하기 싫다!’·‘여성들도 안전하게 밤거리를 걸을 권리가 있다!’…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구호들이 거리에 울려퍼지는 것을 보며 해방감을 맛보기도 했다. 물론 이 ‘해방감’은 그 자체로 여성들의 삶의 조건을 나타내기도 한다. 집회를 하고 성명서를 발표하고 목터져라 구호를 외쳐서 얻으려는 권리가 ‘안전하게 걸어 다닐 권리’라니.

하지만 달빛 시위를 하면서 바라본 거리의 표정에는 뭔가 다른 에너지가 있었다. 대체 뭘 주장하는 시위냐고 어리둥절하게 묻던 40대 아저씨·너무너무 필요한 일 한다며 좋아하시던 노점상 아주머니·표정관리 못하고 우릴 노려보던 20대 청년·유인물을 꼼꼼히 읽어보며 걸어가는 여자와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그녀의 남자. 반응은 가지가지였지만 적어도 이 ‘상식적’인 주장을 담은 시위가 종로 밤거리에 어떤 균열을 낸 것만은 분명했다. 웬 재수없는 남자가 시위대 들으라는 듯이 지껄이던 헛소리가 행진하던 여자들의 목소리에 파묻혀 사라졌던 짜릿한 에피소드도 있었고.

달빛시위가 끝나고 돌아오는 밤길에 나는 어깨를 펴고 걸으며 정리 집회 때 있었던 40대 중반 여성의 발언을 떠올렸다. 그녀는 ‘딸에게 일찍 들어오라고 할 필요 없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마도 이런 종류의 강력한 바람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게 아닐까. 내년 이맘 때 달빛 아래 다시 본 거리가 올해 본 거리보다 조금은 더 밝아져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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