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 제시카 파커가 신었던 바로 그 부츠’. 한 온라인 해외구매대행 쇼핑몰의 상품소개문구다. 대부분 이런 상품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며 조기 품절돼, 고객 게시판은 재입고를 문의하는 사람들의 요청글로 시끌벅적하다.

‘Friends(프렌즈)’는 우리나라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 ‘논스톱’의 설정과 에피소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Sex And The City(섹스앤더시티)’는 이 작품으로 세계적인 패션 리더 자리에 오른 사라 제시카 파커(캐리 역) 등 네 주인공의 패션과 뉴욕 전문직 여성들의 라이프 스타일로 국내 여성들의 관심을 끌었다. 우리나라에서 ‘프렌즈’가 방송가의 ‘시트콤 교과서’라면, ‘섹스앤더시티’는 좀 더 멋지게 살고픈 도시인들의 ‘트랜드 사전’인 것이다.

‘섹스앤더시티’의 사라 제시카 파커(캐리 역)뿐 아니라 ‘Ally McBeal(앨리의 사랑 만들기)’의 칼리스타 플록하트(앨리 역), ‘프렌즈’의 제니퍼 애니스톤(레이첼 역) 등 여성 주인공의 뉴욕 생활은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20∼30대 여성들은 그들의 옷·음식뿐 아니라 그들의 일·파티 문화 같은 라이프 스타일까지 똑같이 따라하고 싶어한다. 이에 대해 문화평론가 이지은씨는 “드라마를 통해 자유로운 성과 생활방식을 습득하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실제로 ‘섹스앤더시티’는 전 세계 미혼녀들의 비밀스럽던 성담론을 밖으로 이끌어내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 드라마에는 작품 소개에 ‘뉴욕 여성들의 파격적인 성생활’이란 문구가 붙어 다닐 정도로 노골적인 성적 묘사가 빈번히 등장한다. 캐리(사라 제시카 파커)를 비롯한 네 주인공은 어느 자리에서건 성생활에 따르는 고민을 터놓고 얘기한다. ‘섹스앤더시티’의 인기와 더불어 우리나라 여성들의 성담론도 자연스럽게 ‘양지로 나오는 길’을 찾았다. 이혼율이 급격히 증가하고 솔로족들이 사회의 한 계층으로 자리잡는 분위기를 타면서 더 이상 여성들이 성에 대해 크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상하지도, 비밀스럽지도 않은 것이 됐다.

남성 동성애자들의 성과 일상을 담은 ‘Queer As Fork(퀴어에즈포크)’도 화제를 모으고 있다. 방송 초반 동성애라는 금기시된 소재와 파격적 영상으로 관심을 끌었던 ‘퀴어에즈포크’는 방송 2시즌에 접어들며 동성애자들의 일상을 양지로 끌어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 드라마가 보여 주는 게이들의 삶과 판타지는 한국 사회의 게이 문화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화드라마를 무분별하게 동경하고 추구하는 것이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가장 극단적인 예로 ‘칼발 성형’을 원하는 여성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섹스앤더시티’의 캐리처럼 폭이 좁고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싶은 욕망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형외과 전문의들은 발의 뼈를 잘라내는 이 수술에 대해 ‘위험한 수술’이라고 우려한다.

외화 드라마 속 모습에 대한 무분별한 동경은 편안해야 할 발뿐 아니라, 국내 패션 브랜드의 존립 또한 위협하고 있다. 해외 브랜드 옷을 동경하는 여성들이 많아지면서 국내 브랜드는 점점 외면받고 있다. 현재 국내로 유통되는 패션 브랜드 1천940여개 가운데 수입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40%에 이른다. 국내 패션 의류기업 ‘제일모직’의 한 관계자는 “외화드라마 시청 후 해외 브랜드를 선호하는 소비자들이 많아지면서 국내 브랜드는 외면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처럼 외화드라마가 무조건적인 사대주의에 빠져들게 하는 ‘마약’으로 작용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치명적일 수 밖에 없다. 국가보안법·파병 등 여러 문제들을 안고 있는 지금, 외화드라마가 해결 통로를 뚫어 줄 신선한 ‘자극제’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유영철 살인사건 보도 후 MBC 뉴스 최일구 앵커는 이런 말을 남겼다. “과학수사의 필요성은 수없이 제기됐지만 달라진 건 없습니다. 요즘 방영되는 미국의 과학수사대 드라마가 부러울 뿐입니다” 지난 2000년 가을 미국 CBS가 ‘C.S.I(CSI과학수사대)’를 방영한 직후, 미국에서는 대학의 수사학 전공수업 수가 대폭 증가하고 현역 수사관은 물론 경찰관과 소방관들까지 과학 전문 수사관이 되기를 꿈꿨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이 드라마가 방영되는 것을 계기로 홀대시 당하는 과학분야에 대한 인식이 바뀔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예나 지금이나 외화드라마는 우리나라에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내고 색다른 사랑과 가치관, 문화를 화면을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고정관념을 깨도록 문을 열어주기도 하고 사대주의에 젖어들게 하기도 한다. 그 속도는 영화나 음악같은 매체보다 느리다. 그러나 그 효력은 훨씬 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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