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80년대, 이데올로기 양산 및 확산의 진원지는 대학이었다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하나의 이즘(ism)에 의한 결집은 시대적 요구였으며 이에 대한 역사의 평가도 호의적이다. 그러나 21세기 대학 사회는 어느 집단보다도 개인존중과 다양성의 논리를 적극 수용하고 있는 곳으로 변모했다. 그것이 순방향이냐 역방향이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겠지만. 여하튼 대학 공동체는 조직의 힘과 통제, 이즘으로 묶인 유대를 가장 잘 대변했던 집단이면서 그것을 가장 먼저 해체한 집단이라 할 수 있다.

개방적 자세, 자유와 다양성의 인정, 개인의 인권존중을 강하게 요구받는 대학에서 통제·강압이란 단어는 사장된 지 꽤 오래다. 그러나 그 시절 이즘을 향한 결속력을 자랑하던 세대가 기득권에 자리해서 인지, 혹은 너무나 견고하고 방대해서 변화가 더딘 것인지, 한국 사회는 용케도 통제와 강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지난 21일(금) 양심적병역거부자에 대한 무죄 선고가 일파만파 급격한 혼란으로 번지고 있는 것을 보면 통제와 강압이 우리 사회의 질서유지에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특정 종교에만 적용시켰다는 문제제기에 대한 고찰, 대체복무제에 대한 논의, 국가 안보에 대한 우려, 사회혼란과 파장에 따른 수습 등 이 판결에 걸쳐져 있는 과제는 많다. 그러나 가장 우위에 둘 문제는, 적어도 동시에 생각해야하는 문제는 인권존중이다. ‘천부인권인 양심의 자유를 법 아래 심판 받게 하는 만행은 잘못됐다’는 사실에 대한 용인이 그 어느 과제보다 앞에 놓여야 한다.

사실 헌법 제37조 2항 후단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못 박고 있다. 양심적병역거부로 인한 병역기피풍조의 확산에 대한 우려에 대해 윽박지를 일은 아니다. 그러나 병역기피풍조 확산 등의 모든 우려는 이미 예상할 수 있다는 면에서 대책 수립 역시 가능하다. 징병제·강제집총의 부당함을 인정하면서도 ‘후환이 두려워’ 변화하지 못하는 사회는 미개한 사회다.

피가 날까 두려워 고름을 키우고 살을 썩게 하지는 않나. 살을 째고 고름을 빼내면 피가 날지언정 살의 부패는 막을 수 있다. 피야 닦아내면 될 것 아닌가.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