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학보 50주년 기념 사진전 준비를 위해 겨울방학내내 지난 50년간 찍은 모든 필름들을 살펴보고 사진을 골라내는 작업을 했다.

사진들을 통해 당시 이화인들의 생활상과 사회상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서, 무엇을 찍은 사진인지에 대한 기록이 없는 사진들이 많아서 전시를 위한 사진 선택에 어려움을 겪었다.

어린 시절에 쓴 일기장처럼 사소한 기록도 세월이 흐른뒤 나에겐 정말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이 된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록은 세월이 흐른뒤 가치있는 기록으로 남기마련임에도 우리는 대부분 기록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기록하는 것을 소홀히 여기곤 한다.

기록에 대한 인식 부족이 개인에 그치지 않고 정부의 무신경한 기록 태도에서도 나타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협의의 경우 피해자 실태에 관한 체계적 자료를 갖고 있지 않아 협상에 필요한 자료를 일본에서 받아야 할 정도라고 한다.

국가간 피해 보상 협의에서 가해국인 일본에게 자료를 받는다니, 자료를 제대로 얻을 수 있을까. 현재 생존하는 태평양전쟁 희생자는 4만 2천여명이고 한 해 1만 5천여명씩 죽고 있다.

앞으로 3년이 채 못돼 생존자는 거의 죽게 되는데 정부가 오로지 믿는 기록이라고는 단지 그들의 증언뿐이다.

남은 생존자마저 모두 죽고 나면 우리 정부는 유가족을 포함한 태평양전쟁 희생자 794만 1천여명의 보상을 과연 어떤 기록을 바탕으로 협상해나갈 것인가. 물론 우리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미쳐 기록물을 챙기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이후에 자료를 모으고 기록을 체계화하는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에게 전쟁이 끝난 후 주어진 50여년은 이런 작업을 하기에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나 보다.

얼마전 농민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칠레 FTA가 통과되었다.

우루과이 협상 등에서 체계적인 자료가 없어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결국 농민들의 울분을 터트리게한 정부의 전력을 생각하면 농민들의 반발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이라도 남기지만 우리 정부가 남긴 것이라고는 우리 국민들의 피해를 보상해 줄 수 없는 ‘기록부재’뿐이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