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나는 동아리에 부족한 물품을 학교에 신청했다.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신청했던 부서에 묻자 그들은 ‘소임을 다해’ 물품 신청건을 윗 부서로 넘겼고, 그 뒤의 일은 모르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넘겨받았다는 부서, 다음 부서, 또 그 다음 다음 부서로부터 돌아오는 답변은 매한가지였다.

순간 나는 내 의사를 전달해야 할 진짜 대상을 알지 못하는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나의 경험이 보여주듯 우리 일상의 소통 시스템은 일종의 피라미드 형태를 띄고 있다.

우리는 이 구조의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으며 우리가 요구·건의하려는 진짜 대상인 정부 관계자·학교 관계자 등 각종 관계자들은 가장 꼭대기층에 ‘모셔져’있다.

우리의 의사를 전달하려면 그 사이에 놓여진 수많은 단계를 거칠 수 밖에 없다.

이 ‘다단계 소통 시스템’의 주범인 사회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단계의 사람에게만 의사를 전달해도 어차피 제일 위까지 전달되니 걱정말라’며 꼬드긴다.

표면상으로야 매우 간편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강요된 편리의 대가로 다음 사항을 요구받는다.

중간 과정을 궁금해하지 말 것, 의견이 전달 도중 사라져도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지 말 것 등등. 결국 사회는 우리에게 ‘감히 이 시스템을 의심하지 말라’는 암시를 걸고 있는 것이다.

지난 주 언론 보도에 따르면 덕수궁 터에 끝내 아파트와 미대사관이 들어선다고 한다.

인근 주민들과 시민단체들의 항의는 시의회 등에서 묵살됐다.

그나마 의견 접수가 쉽다고 알려진 곳에서 자기들 소관이 아니라며 ‘뻥’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소통하길 포기하라는 강요이며, 불만이 있어도 입 다물라는 협박이다.

우리가 이처럼 삶의 문제에 관여할 수 없는 것만 봐도 이 사회의 소통 시스템은 지독히 비민주적이다.

지금 당장 이 시스템을 벗어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소통 구조가 바뀌리라는 믿음으로, 사람들은 복권을 긁듯 끝없이 직접 소통·쌍방향 소통에 도전하고 있다.

우리 학교 학생회가 늘 그러했으며 수많은 NGO와 시민단체들이 그러하다.

로또 복권에 당첨되듯 이 소통 구조를 단번에 ‘역전’시킬 수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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