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보사에서 구른 ‘짬밥’이 쌓일대로 쌓여 이제 막 4학기차 원로자리에 앉았다.

제법 노련미가 풍겨나올 법도한데, 처음 맡은 임무와 책임에 적응 못하고 헤매는 꼴이란 수습기자의 그것 못지않다.

모든 일의 ‘처음’이 그렇듯이. 어디에도 선배만한 교과서는 없기에 지난 부장기들의 처음을 떠올려봤다.

지금까지 내가 봐온 부장기는 본격적인 신문제작을 준비하는 방학동안 인터넷 ‘e-이대학보’의 활성화, 신촌지역 대학언론연대 결성 등 학보사의 큰 사업 하나씩을 일궈냈다.

바로 이맘때가 그 굵직한 사업들의 성과가 보일 즈음이고, 부장기의 처음을 평가하는 시기다.

이번 부장기의 사업은 ‘이대학보 창간 50주년’을 잘 치뤄내는 것이다.

이전의 선배 부장들은 ‘어떤’ 사업을 ‘어떻게’ 달성할지 고민했다면, 이번 부장들은 필연적으로 주어진 사업을 어떻게 ‘잘’ 치뤄낼지를 고민해야했다.

미묘한 차이가 있는 두 경우 중에 어떤 것이 더 힘들고 덜 힘든지는 비교할 것이 못되지만 언제나 남의 짐보다 내 짐이 더 무거운 법이다.

더 부담스러운건 ‘잘’ 치뤄내야하는 쪽이 아닐까. 학보사 성원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의 냉정한 평가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통상 사람들이 ‘처음’에 부여하는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이대학보가 첫 신문을 낸 1954년 2월12일을 매년 기념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 이번엔 50이라는 숫자까지 붙어 20면이란 방대한 양의 신문을 찍어낸 것도 그 때문이다.

문제는 ‘처음’이 그처럼 기념비적인 성격만 갖고 있는게 아니라 두려움과 불안, 무엇보다 미숙함을 덕지덕지 달고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이를 덮어줄 수 있는건 초심자 특유의 열정과 긴장인 것 같다.

덕분에 그 어느 기획보다 뜨겁게 고민할 수 있었고 20면 제작에 겁없이 덤빌 수 있었다.

방학을 시작하면서부터 창간호를 준비했지만 기사를 쓰고 면을 구성하는 작업은 마치 법칙처럼 어김없이 1주일이다.

‘처음’이 아니었다면 2주 분량에 해당하는 20면을 1주일만에 마감할 수 있다는 그 무모한 생각을 감히 할 수 있었을까. 덕분에 2박3일 동안 가정관 지하1층에 갇혀서 꼬박 밤을 새야 했지만 말이다.

이제 학보사에서는 윗사람들에게 배울 것보다는 아랫사람들에게 보여줄 것이 더 많은 자리인 만큼 부끄러운 고백은 오늘까지만이다.

한 주만에 2주일치를 속성으로 배운 셈이니 앞으로 더 나은 ‘이대학보 만들기’에 제 몫을 하는 거름이 되길 기도해본다.

50주년 창간기념호에 미숙함만이 배어있을까 여간 걱정되는게 아니지만 반세기 동안 이대학보사 기자들이 흘린 땀과 이화인들의 사랑을 이어가기 위한 ‘내림 굿’을 받은 것 같은 기분에 묘한 든든함도 생긴다.

칼럼이라고 준 란에 구구한 변명이 길어졌다.

2004년을 시작하는 이대학보사의 ‘처음’을 보다 신중하게 평가해주십사, 또 이대학보의 ‘처음’ 그 날을 함께 축하해주십사 하는 ‘초보국장’의 부탁으로 봐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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