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 시절, 우리 학교 출신 교수가 진행하는 모 대학의 수업을 취재하러 갔었다.

수업 내용은 여성 운동에 관한 것이었고, 그 마지막엔 토론 시간이 주어졌었다.

잠시 후, 청강차 참석한 듯한 한 남자 교수는 질문을 해도 되냐며 “소위 여성학의 메카라는 이대가 학문적 여성학이나 하지, 실제로 뭘 실천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여기까지 들었을 때 난 그가 하려는 말이 실천적 여성학 정립의 필요성에 대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예를 들어보자며 그가 덧붙인 말들은 날 정말 황당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듣자하니 이대에는 200평인가 되는 공주방이란 화장하는 방이 있다더라’, ‘이대생들도 남자들한테 잘 보이려고 성형하고 헬스하고 이러는거… 사실 직업적으로 몸을 이용하는 여성들이 하는 행동이랑 뭐가 다르냐’ 등등의 말이었다.

그는 질문을 하겠다며 말을 시작했지만 결국 그 과정에서 표현된 것은 여성에 대한, 나아가 이대생에 대한 개인적 오해 혹은 근거없는 편견에 지나지 않았다.

2평도 안되는 포관 파우더 룸을 200평이라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은 당시 ‘이화’란 이유로 사건 아닌 사건을 선정적으로 보도한 언론의 탓으로 돌린다 치자. 그렇다 해도 연이은 그의 논리들은 교수라는 지식인에게 기대했던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질문을 가장한 ‘이대 출신’의 여성학 교수에게 던지는 비아냥 혹은 질책의 느낌에 가까웠다.

하지만 여성학 교수는 냉정을 잃지 않고 그의 질문(?)에 논리적으로 답했고, 결국 마지막엔 감정적으로 접근했던 남자 교수도 이성적으로 함께 이끌어 낸 결론에 수긍하며 겸연쩍어 했다.

이화를 향해 쏟아지는 근거없는 꼬인 말들, 그건 우리에게 그다지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적으로 성숙한’ 교수에게서까지도 서슴없이 튀어나올 수 있다는 사실은 내겐 충격이었고, 그런 상황에서도 냉철하고 현명하게 대응하는 여성 교수의 모습은 특별한 인상으로 남았다.

사람들은 흔히 여성의 사회 활동을 ‘맨손으로 정글 속을 걷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만큼 이화를 벗어나 만나게 되는 사회가 결코 여성 사회인에게 만만치 않은 곳임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비록 사회가 여성들에게, 나아가 이대 출신 여성에게 ‘정글’일지는 몰라도 나는 이들이 ‘맨손’으로 정글을 걷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 이유는 여성들이 가진 능력이 여성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을 바꿔나갈 수 있을 만큼 값지고 뛰어난 것이라 믿기 때문이고, 여자냐 남자냐의 기준으로 나를 규정하거나 한계 짓지 않고 어디까지나 ‘나’란 존재 자체의 능력과 비전에 집중했던 이화에서의 시간을 믿기 때문이다.

4kg의 카메라를 메고 포토라인에 서있는 사진 기자 중 유일한 여성인 나를 발견할 때 난 기분이 좋다.

내가 한 일이 빛을 발해 능력으로 평가 받을 때 행복하다.

난 정글이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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